[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우리말은 참으로 신비롭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다 표현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선조들은 이런 놀라운 한글을 만들어냈을까, 감탄할 때가 많다.
붕글국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이름의 음식 이름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이름도 귀여운 붕글국은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즐겨드시던 음식이었다. 국이 붕글붕글 끓는다고 해서 붕글국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붕글붕글은 부글부글의 사투리쯤 되겠다.
할아버지가 붕글국을 찾는 날은 주로 을씨년스러운 겨울이었다.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하늘이 내려앉고 바람마저 불어 으슬으슬한 날이면 할아버지는 “붕글국 먹자”고 하셨다.
우리 시골에서 붕글국은 수제비와 비슷한 의미로 통용된다. 그러나 수제비보다 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약식 수제비가 붕글국이다.
수제비는 직접 만들어 먹으려면 노력이 꽤 필요한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 잠시 숙성시켰다가 손으로 얇게 펼쳐가며 한 입 크기로 뜯어내 끓여야 한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수제비는 한 번 해 먹으려면 심기일전, 공 들일 결심을 해야 한다.
그러나 붕글국은 다르다. 수제비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밀가루에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대충 개어 끓는 물에 뚝뚝 떠 넣으면 된다.
숟가락으로 반죽을 개는 것도 귀찮다, 더 격렬하게 대충 만들고 싶다. 이런 사람을 위한 초초초 간단 레시피도 있다. 끓는 물에 날 밀가루를 훌훌 뿌리는 방법이다. 그야말로 날로 먹는 레시피다.
국물은 신 김장김치를 다져 넣는 김칫국이다. 팔팔 끓는 김칫국에 날 밀가루를 흩뿌리면 밀가루가 국물과 만나 뭉치면서 투명하게 익는다. 전분이 국물에 퍼지면서 김칫국이 되직해진다. 국물이 되직해지니 끓을 때 기포를 내면서 부글부글 소란해진다. 말 그대로 붕글붕글 붕글국이 된다.
멸치 육수를 내고 다시마 한 장을 넣어 밑국물을 만들면 좀 더 깊은 맛을 낼 수 있다. 육수 내기 귀찮을 때는 미원과 다시다라는, 며느리 빼고 다 아는 비법의 도움을 받으면 간편하게 노포의 맛이 난다. 신 김치를 넣었으므로 마늘은 따로 넣지 않아도 좋다. 김치만으로 기본 간은 충분하지만 그래도 싱거울 때는 조선간장을 약간 넣는다. 대파가 있다면 쫑쫑 썰어서 넣고 불에서 내린다. 그릇에 담고 깨보숭이를 듬뿍 뿌린 후 섞어 먹는다.
날 밀가루를 뿌린 붕글국은 진한 김칫국 맛인데 전분이 걸쭉해진 국물이기 때문에 마치 중화요리 게살수프처럼 미끈미끈 술술 넘어간다.
신 김치로 만드는 김칫국은 겨울이면 으레 집집마다 식탁에 오르는 단골 국이다. 감기라도 걸릴라 치면 뜨거운 김칫국에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먹으면 뚝 떨어진다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울푸드인 김칫국이 밀가루와 만나 한층 진한 맛을 전해주는 것이 붕글국이다.
붕글국과 비슷한 느낌의 음식으로 경상도의 갱시기죽이 있다. 갱시기 죽은 신 김치와 찬밥을 넣고 끓인 김치죽이다. 갱시기 죽은 밥이 풀어지면서 국물이 되직해진다.
올 겨울은 유난히 스산하고 암울해 마음까지 얼어붙은 기분이다. 춥고 으슬으슬한 이놈의 겨울은 언제 끝나나, 어깨를 웅크리며 걷다가 겨울이 지긋지긋 미워지려 한다.
이런 날에는 부글부글 붕글국을 끓여 먹어야 한다
한 그릇 후루룩 마시면 뱃속이 뜨끈해지면서 콧등에 땀이 맺힌다. 뜨거운 국물로 온몸을 덥히고 나면, 남은 겨울을 잘 견뎌볼 힘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