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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Feb 13. 2021

그동안 소외됐던 꿈은 없나요

현란하게 날아다닐 손가락을 꿈꿔봅니다.

책방 아들 시절의 이야기다. 

책에 둘러싸여 책을 읽고 있으면 언제나 띵동띵동 띵도로롱~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서점의 바로 옆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고 피아노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피아노 소리가 너무너무 좋았다.

매일같이 피아노 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서점의 책장을 마주 보고 앉아서 

책장 밖으로 튀어나온 책 위에 대고 피아노 치는 시늉을 했다.

피아노 소리는 하루 종일 들렸으니까 

어떤 날은 책장 앞에 앉아 하루 종일 피아노 소리에 맞춰 피아노 치는 흉내를 냈다.

피아니스트라도 된 듯, 음악에 손가락을 맞춰가며 열심히 연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피아노 학원을 보내달라는 시위도 아니었고, 강렬하게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항상 들려오던 그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학원 앞을 지나다닐 때 언뜻언뜻 열리는 문틈 사이로 보이던 피아노 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부러웠던 걸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책장 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나를 보다 못한 엄마는 

결국 나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게 되었다.

그게 나와 피아노의 첫 인연이었고, 그 인연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간 이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가장 크게 차지하게 된 건 책과 피아노, 이렇게 두 가지가 되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피아노 학원을 며칠 다니면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이 피아니스트로 바뀌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를 한 대씩 샀다. 

지금도 고가의 물건이지만 그 당시 피아노는 부의 상징처럼 여겨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유행같이 피아노를 하나씩 들여놓고는 

내 자식이 피아노를 너무 잘 친다고 영창이니, 삼익이니 하며 자랑 아닌 듯 자랑을 했다.

내가 보기엔 그 집 딸내미는 아직 그 정도로 피아노를 잘 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우리 집은 피아노를 살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학원에서 연습 수첩에 연습한 횟수만큼 사과를 그려가며 피아노를 치는 게 전부였다.

어느 날은 선생님한테 볼펜으로 손등을 맞고 집에 와서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바탕 울면서 다시는 피아노 학원을 안 간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쳤다.

그 정도로 피아노 치는 게 좋았다.

1학년 때 책장 앞에 앉아 피아노 치는 흉내를 내던 그 마음이

6학년이 되도록 변하지 않고 가슴속에 남아 당연하게 내 일인 양 피아노를 쳤다. 


중학생이 되고 멀리 이사를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음악시간, 갑자기 선생님이 기악 실기시험을 보겠다고 하셨다.

각자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음악 한 곡을 외워서 연주하는 시험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실기시험의 악기로 피아노를 선택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집에 피아노가 없었다는 것이다.

학원은 이미 그만두고 멀리 이사를 오게 되었고

그렇다고 다른 애들처럼 리코더나 단소로 시험을 보기는 싫었다.

수소문 끝에 결국 피아노를 가지고 있던 먼 친구 집으로 연습을 하러 다녔다.

기악 시험은 무사히 마쳤지만 나도 피아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 보다 오히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나니 

문득문득 피아노가 치고 싶어 지면서 피아노 로망이 시작된 것이다.

피아노가 치고 싶어 지는 순간은 성인이 되고, 나이를 더 먹어도 찾아왔다.

그래서 직장인이 된 다음에도 퇴근 후에 피아노 학원을 다니거나 

연습실을 찾아보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는 언제나 내 생활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곤 했고,

생각에만 머물다가 잊히기를 반복하면서 쉽게 실행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피아노를 통해, 악기를 하나 다룬다는 것이

노력과 연습만으로 한 곡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이는 비단 악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족한 상황에서도 애정과 노력을 통해 피아노를 치며 한 곡씩 완성했던 그 기억이

여전히 나에게는 피아노에 대한 로망으로 남은 건 아닐까.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시 피아노를 쳐보고자 한다.

오래간만에 피아노 앞에 앉게 되면 

악보를 읽지 못해서 헤매고, 어렵게 읽은 악보에 손가락이 따라오지 못하겠지만

노력과 연습으로 캐논 변주곡도, 쇼팽의 녹턴도 멋지게 한 곡씩 완성해보고 싶다.


피아노에는 오른손잡이, 왼손잡이가 없다.

글씨를 쓰거나 젓가락질을 할 때처럼 한 손이 소외당하는 법이 없다.

오른손만큼 왼손도 충실하게 연습을 해야 되고

열 개의 손가락을 조화롭게 움직여야 음악은 완성된다.

피아노를 치며 매일 반복되는 일 말고 그동안 소외된 꿈을 돌아본다.

그리고 잊지 않고 그 꿈을 위해서도 노력한다.

그것들이 조화롭게 채워질 때 인생도 멋지게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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