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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휘찬 Oct 16. 2021

시간에 나를 채워 넣기

시간을 때우지 않는 방법 

"이제 일 시작했어요?"


오래간만에 머리를 자르러 간 미용실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디자이너 선생님이 묻는다. 


"아뇨. 아직이요. 이제 슬슬 시작해야죠."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건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이미 여러 번 같은 대답을 했던 사실에 좀 머쓱하다. 3-4주에 한 번씩 가던 미용실의 방문주기가 일을 쉬면서 길어졌다. 한 달반만에 가기도 하고, 두 달만에 가기도 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덜 신경 써도 된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머리를 자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진작 퇴사 얘기를 했는데, 그 이후로는 갈 때마다 나의 이직 상황이 궁금하신가 보다. 비슷한 또래라서 남일 같지 않은 건지.


"노는 게 잘 맞나 보네. 나는 한 달을 못 놀겠던데."


글로 쓰고 보니 좀 비아냥거리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건 서로 알고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뱉는 '오지랖'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불쾌하지 않았다. 이어진 그의 이야기는 이직을 하면서 3달 정도를 쉬게 되었는데 한 일주일 쉬고 나니 도저히 할 게 없더라,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 해장하고 피시방에, 당구장에,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생활의 반복이었고 그나마도 한 달 지나니까 좀이 쑤셔서 집에 있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일당 알바도 하고 그랬다는 경험담이었다. 시간을 때우는 건 한계가 있다. 나도 그렇게 생활했더라면 이렇게 오래 쉬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로 하지는 않았다. 


10월에 입사한 첫 직장을 몇 년간 다니다가 10월에 퇴사하고 정확하게 1년이 지나 다시 10월이 되었다. 정확하게 1년의 휴식기를 가졌다. 처음에는 단지 일찍 일어나지 않아서, 지옥철을 타고 출근하지 않아서, 밤낮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업무 연락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건 단 며칠뿐이었다. 그사이에 여러 사람들로부터 불안하지는 않은지, 혹은 돈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등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시 취업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잠 못 이루던 시기도 있고, 소득 없이 소비만 이루어지는 생활에 걱정스러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휴식기간이라고 생각하니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서 그냥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직장생활 때문에 하지 못했던 걸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놀아도 확실하게 놀고, 쉬어도 확실하게 쉬고 싶었다. 종일 누워서 넷플릭스만 보다가 하루가 다 지나고 나서 '아이고, 뭘 했다고 하루가 이렇게 다 갔지.'라고 생각하긴 싫었다. 그렇게 보낸 하루는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될 것이고, 그럼 일 년이 지난 다음에 '아이고, 뭐 한 것도 없이 일 년이 다 갔네.'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취침-기상 시간을 최대한 지켜서 생활했다.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건강한 몸을 유지해야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밤낮이 바뀌고, 식사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생활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두 번째로 하루를 계획대로 생활했다. 주간, 월간 계획도 세웠다. 주요 일정이나 약속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도 어김없이 계획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책 읽는 시간, 글 쓰는 시간, 운동과 피아노 연습까지 모두 그동안 좋아하고, 하고는 싶었지만 회사생활을 하면서는 제대로 할 수 없던 일들이었기에 그것들을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오히려 집에만 있는 날이 더 바빴다. 누군가는 참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떠한 압박도 없이 시간 속에 나를 채워 넣을 수 있었고 지나간 시간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은 캘린더 어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 번째, 기록에 집착했다. 계획이 과정이라면 기록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SNS에 열심히 업로드를 하게 되었는데 마음에 남는 책, 멋진 장소, 피아노 연습 영상 그리고 그 시간 속에 행복했던 나의 모습까지 일기처럼 저장했다. 또한 매일 일기를 쓰기는 어려울 것 같아 한 달이 끝날 때마다 브런치에 '월기'를 썼다. 적어도 그 기록들을 보면 지나간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지나간 일 년의 시간 동안 나는 학원을 다니거나, 자격증을 따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결과물이 있지 않더라도 '백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파란 츄리닝을 입고 방바닥에 누워 머리를 긁고 있지는 않았다.


1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직장생활 앞에서 나는 그동안 느낄 수 없는 긍정적인 마음을 느꼈다. 쉬는 동안 책을 열심히 읽다 보니 책을 읽는 건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운동을 통해 변해가는 나를 발견하는 재미를 알게 되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불규칙적인 직장생활에 대한 불평불만과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다며 핑곗거리만 찾았다면 지난 며칠간 여전히 하루의 계획을 세우고,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한 시간씩 책을 읽고, 퇴근 후에도 계획에 맞춰 생활하면서 나름의 성취감을 느꼈다. 이런 시간이 모여서 점점 더 큰 성취감이 되어 돌아온다면 좋겠다. 지난 1년간의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 시간을 채우는 법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를 채운 시간은 새로운 시작에서, 다시 반복될 직장생활에서, 앞으로의 인생에서 조금은 든든한 에너지가 될 것이라 믿는다. 


시간을 때우면 

시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버리지만

시간을 채우면

시간은 결과나 과정으로, 변화나 극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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