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많이 부는 가을입니다. 얼마 전까지 그토록 푸르렀던 창밖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다가, 문득 내 마음속에도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낡은 기억들 말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계절의 상처, 돌아오지 않을 사람에 대한 미련,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선택들에 대한 후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벼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주고받았던 상처와 미련과 후회들을 버리지 못해 늘 자신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아픈 상흔을 꽉 쥐고 있을까요. 마치 놓으면 내가 텅 비어버릴 것처럼.
낡은 기억을 붙들고 있으니 새로운 기억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과거의 무게에 짓눌려 오늘의 가벼움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일상이기도 했습니다.
신경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부정성 편향'이라는 게 있습니다. 사람은 부정적인 기억을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진화 과정에서 위험을 기억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랍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 낡은 상처들이 정말 필요한 경보일까요?
기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된 영상이 아니라, 꺼낼 때마다 조금씩 변형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번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사실은 그 기억을 더 무겁게, 더 아프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우선 집에 있던 낡은 물건들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사물은 그대로 우두커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고 과거에 머물러 있기에, 더 이상 내게 필요 없는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물건을 다 버리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서는 좋지 않은 기억들을 하나씩 써보고 가운데에 줄을 그어가며 지워봤습니다. 외면할 것이 아니라 마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용기가 없어서 늘 숨겨두고만 있었기에 쉽게 그 기억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새 종이에 그동안 좋았던 기억들을 쓰고, 좋은 기억을 안겨준 사람들을 떠올려봤습니다.
놀랍게도 좋은 기억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단지 낡은 상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을 뿐. 떨어진 나뭇잎 아래 이미 새순이 준비되어 있듯이, 비워낸 마음의 자리에는 이미 따뜻한 기억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혹시 낡은 기억의 무게로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진 않나요.
가을바람이 나뭇잎을 떨어뜨리듯, 우리도 가볍게 놓아주면 좋겠습니다.
아프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