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버티며 산다.
한가위를 일주일여 앞두고 60대 남성이 응급실로 입원한다.
폐질환으로 5년이 넘게 수도 없이 병원에 다녔다.
몇 걸음 걷기도 힘들어하는 환자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난다.
입원 치료가 필요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치료를 거부한다.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말만 할 뿐 자세한 설명이 없다.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지금도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치료보다 더 급한 일이 있을까?
혹여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급하다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건강 상태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당장의 치료는 거부한다.
제발 입원을 미뤄달라고 사정까지 한다.
“내일 다시 입원하겠습니다.”
“그때는 치료 잘 받겠습니다.”
오늘은 불가능하고 내일은 가능하다?
스무고개가 아니다.
그렇게 치료를 거부했던 환자는 퇴원 서약을 했고 다음 날 다시 나타났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치료를 잘 받겠다고 한다.
하루 전 왜 그토록 입원을 거부했던 걸까?
한참을 망설이다 말문을 뗀다.
해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지역 복지관에서 저소득층에게 전통시장 상품권을 나눠준다고 한다.
어떤 개인적인 사유도 인정되지 않으며 오로지 선착순으로 나눠준다고 한다.
지역 복지관에서도 분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통증과 불편함을 호소하고 퇴원 시 위험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고서도 생계를 위해 입원을 거부해야만 했다.
숨쉬기조차 힘든 몸으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릴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렇게 상품권을 받아 들고 환자는 다시 입원했다.
누가 건강해지고 싶지 않을까?
누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지 않을까?
건강의 불평등은 소득 수준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가난하면 더 아프다.
가난한 사람이 더 치료의 기회가 적다.
고개만 돌리면 서너 개의 병원을 볼 수 있지만, 그들에게 병원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다.”
“오늘 벌어야 내일이 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말이다.
부끄럽다며 말문을 닫아 버린다.
가난이 부끄럽다고 말한다.
가난이 개인의 문제인지 사회의 문제인지 구분하기를 떠나 그들 스스로 숨어버린다.
말을 해도 이해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지어버린다.
사각지대에 놓은 채 스스로 사회에서 점점 멀어진다.
하루를 버티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