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며칠째다.
대기질이 형편없을 때는 근신 모드를 지키는 게 상수다.
현역에서 활동하는 경우라면 부득이 하나 한갓진 은퇴자이니 집안에 머물며 책 속에 푹 잠겨 지내는 중이다.
한인타운 알라딘에서 책을 몇 권 골라온 덕택에 여러 소설을 접할 수 있었다.
인문학 도서보다 아무래도 소설은 술술 넘어가는 재미도 있는 데다 특이한 군상들과 조우할 수 있으니 흥미가 진진하다.
온갖 문학상을 휩쓸다시피 해 문단이 편애하고 시대가 사랑하는 소설가라는 김연수.
그의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뒤따르는 달달한 언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란 문장을 먼저 보았다면 단언컨대 그런 책은 사지를 않았을 터.
양갈래머리 소녀의 실루엣 애잔한 그 소설을 고른 것은 순전히 바로 그 앞에 읽은 <7년의 밤>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정유정의 장편 7년의 밤은 끔찍한 폭력과 잔인한 범죄가 난무한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중심으로 얽혀 들어가는 주변 인물들의 운명을 여류 같지 않은 필체로 그려냈다.
5백 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단숨에 읽히는 흡인력 있는 소설이다.
폭력의 연쇄를 통해 작가는 ‘가족 결핍’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 소설의 인물들 모두 가족 안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거의 배우지 못한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내게 확실하게 각인된 소설가 구효서.
자기 나름의 색깔로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라는 구효서의 <소금 가마니>를 읽었다.
수많은 고통들을 소리없이 참고 견뎌내며 간수 같은 삶을 살다 눈감아, 마침내 자식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게 된 어머니의 이야기다.
일자무식으로만 알았던 어머니의 유품에서 나온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을 통해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어머니를 읽는 주인공이 화자다.
'냉소와 위악'의 태도를 가진 작가, 냉정한 안목으로 인간의 허위와 위선을 가차없이 드러낸다는 은희경.
모처럼 그의 경쾌한 소설 <마이너 리그>를 읽었다.
58년 개띠 동창생 네 사내의 얽히고설킨 25년 삶을 추적하면서 '마이너 리그' 즉, 한국사회의 '비주류'인 대다수 보통 사람들의 인생유전을 다뤘다.
가볍되 결코 경박하지 않은 특유의 서사력이 역시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싶을 때 언제든 마음대로 책을 골라볼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서 독서에 갈급증을 느끼던 차, 새로운 길을 찾았으니 말 그대로 궁즉통 아니겠는가.
종이책만을 읽다가 뒤늦게 맛 들이게 된 오디오북, 데스크탑에서 보고 싶은 책을 골라 듣고 있다.
폰으로도 마찬가지. 오디오북으로 들어가면 여러 책과 만날 수 있다.
예약해 둔 책을 찾아 '듣기'를 눌러놓으면 얼마든지 다른 일, 이를테면 옷장 정리를 한다거나 나무새를 다듬으며 들을 수 있어 아주 유용하게 이용한다.
적당히 볼륨을 올린 뒤 주로 책 읽어주는 남 & 여에게 책을 맡겨두고 대신 나는 소소한 다른 일을 하며 귀만 열어두면 되는 셈이다.
집에 가만 앉아 무상으로 이런 특별 혜택까지 누리다니 참 좋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세상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지금처럼 영화나 연극과 드라마, 인터넷 같은 매체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소비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세기 전.
한참 전, 구술 문화가 문자 문화로 이동하자 이 변혁에 쉬 적응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문맹계층도 다수였던 시기.
거기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서책이 보편화된 시절도 아니라서 책값이 상당히 고가였다.
필요와 수요에 따른 공급 체계는 자동으로 생겨난다.
그래서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전기수라는 이색 직업이 우리나라에서도 등장하게 된다.
조선조 중 후기의 전기수들은 주로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중국 고전들과 임경업전 류의 영웅소설부터 심청전, 춘향전, 옥루몽까지 다양한 소설을 읽어줬다.
단순히 읽어내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희로애락이 담긴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 사람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다 한다.
문헌기록으로는 조수삼의 추재집 (秋齋集) 기이편(紀異篇)에 전기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몰락한 세도가 자제가 종으로 팔려가서 글을 읽을 줄 아는 덕에 주인집 책비가 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서양영화를 보면 귀족의 장원이나 왕실 살롱에 고용돼 직업적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처럼 책 읽어주는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 어렵지 않게 만나곤 한다.
실제 영화 제목에 '책 읽어주는 남자'가 있으며, 프랑스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는 많은 이들이 본 바와 같이 일종의 부업이다.
위의 어떤 경우건 당연히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지만 유튜브 오디오북은 일체 무료 서비스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이니 누군가의 말처럼 태양왕 루이 14세보다 더 풍요와 호사를 누리고 산다는 말에도 수긍이 간다.
요즘 오디오북에 들어가 입맛대로 폭식, 여러 책을 섭렵했다.
그러나 독서는 역시 직접 페이지를 넘겨 서향(書香)을 느끼면서 눈으로 읽어야 몰입도도 높고 글맛이 제대로 살아나는 거 같다.
이는 마치, 글을 쓸 때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보다는 아날로그 식으로 종이 위에 또박또박 펜을 눌러가며 손글씨로 써야만 집중이 잘되는 것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