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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Feb 27. 2024

마음의 짐을 어떻게 덜어볼 수 있을까

무의식의 탐색과 표현

  사람들은 마음의 짐을 하나씩 이고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의 짐은 깃털만큼 가볍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의 짐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겁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각 다른 무게의 마음의 짐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근력 운동을 적당한 중량으로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적당한 부하를 주는 근력 운동은 신체가 보다 튼튼해질 수 있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부하를 주는 근력 운동은 오히려 신체에 손상을 주어 위험합니다. 그래서 헬스장의 사람들은 자신의 운동능력에 맞게 중량을 절하며 근력 운동을 해나갑니다. 다치지 않아야 운동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몸을 가꿔갈 수 있으니까요.


  마음도 비슷합니다. 마음의 짐을 적당한 수준으로 관리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성장통이 되듯, 적당한 수준의 마음의 짐은 우리의 정신을 보다 튼튼해지도록 돕습니다. 반면 과도한 마음의 짐은 우리의 정신을 보다 취약한 상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직접 겪으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만한 것들이죠. 하지만 헬스장에서 중량을 조절하는 것과 마음의 짐을 조절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헬스장에서는 중량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마음의 짐들은 무게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이제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바로 무의식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10톤의 무게를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마음의 짐은 무게를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무의식에 존재하는 마음의 짐


  자주 설명드렸던 내용이지만, 억압을 통해서 형성된 무의식에 있는 마음들은 난폭한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한번 아래층으로 내려간 마음들은 계속 억압을 받고 있기에 다시 위로 올라오기가 힘듭니다. 쉽게 말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는 쉬워도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 구조입니다. 때문에 의식보다는 전의식에, 전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마음의 짐들이 더 많이 존재합니다. 프로이트가 의식을 빙산의 일각에 비유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마음의 짐 중에서 대부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1kg의 아령인줄 알고 운동하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실제로는 5kg의 아령이였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하를 몸에 가하고 있었던 상황이 되어버리겠죠. 이런 일이 마음에서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자기 검열이 심하거나 억압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 수록 무의식 속에 치워둔 짐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마음의 짐이 거의 없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마음의 짐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도가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무의식에 존재하는 마음들을 의식할 있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자신도 모르는 채로 마음의 짐을 무리하게 는 일이 사라질 것이고, 만약 이미 과도하게 짐을 들고 있었다면 내려놓을 수도 있게 되겠죠. 그래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탐구했습니다.


무의식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져요


  무의식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의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프로이트의 초기 정신분석에서 강조되었던 부분입니다. 카타르시스를 아시나요? 이는 마음 속에 쌓여있던 응어리진 감정들이 풀리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정신분석에서는 제반응(abreac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제반응은 의식 아래에서 묻혀있던 경험을 표현함으로써 무의식에 갇혀있던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해소될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개념인데요, 다음의 예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평소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싫어하는 A씨가 있습니다. 최근에 A씨는 믿었던 친구 B씨에게 배신을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막상 A씨는 이에 대해서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A는 이런 일로 힘들어하는 것은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대해서 괜찮은 상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A는 친구 C씨를 만나서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A는 문득 B에게 배신당했던 일이 떠올라서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배신당했던 이야기를 시작하니, A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A의 마음에서는 슬픈 감정이 떠올랐습니다. 이에 A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슬픈 마음을 한바탕 풀어낸 뒤의 A는 후련해진 마음을 가지고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시의 A씨처럼 묻어두었던 감정을 꺼내는 과정은 혼란스럽거나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에 묻혀있던 마음을 꺼내놓는 것은 결국 진정으로 평온한 마음상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제반응입니다. 그래서 초기 정신분석치료를 받았던 내담자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치료를 두고 말하기 치료(talking cure)라고 부르기도 했었습니다. 내담자의 입장에서는 말하면서 치유받았던 경험이 가장 인상깊었기에 이런 말이 생겨났던 것이 아닐까요.




무의식은 어떻게 떠올릴 수 있을까


  일반적인 상황에서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평소에 무의식은 억압을 통해서 억눌러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억압의 힘을 느슨하게 할 수 있다면 무의식에 다가가는 것이 보다 쉬워질 수 있겠죠. 때문에 정신분석에서는 무의식이 억압에서 벗어나 의식 세계에 드러날 수 있도록 최면, 자유 연상, 꿈의 해석과 같은 기법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꿈의 해석은 이전에 설명드렸으니 나머지 기법들만 여기서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최면


  초기의 정신분석에서는 최면을 사용해서 억압에서 벗어나 마음을 깊이 탐색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최면은 사람들의 피암시성과 사고의 유연성을 높여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치료자가 무의식에 접근하려고 할 때, 내담자가 억압을 내려놓고서 치료자가 이끄는 대로 무의식을 보다 잘 탐험할 수도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최면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무의식에 접근해보려 했지만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최면을 포기하고 자유 연상 기법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탐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유 연상


  자유 연상은 말 그대로 이름처럼 자유롭게 연상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게 무슨 기법인가 싶기도 합니다. 원래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방해할 수도 있는 사람은 진료실에 적어도 한 사람이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내담자 자신입니다.


  이전에 프로이트는 성적 욕구(libido)공격성(aggression), 즉 공격하고 싶은 욕구를 강조했었다고 설명드렸죠. 이들은 입밖으로 꺼내기에는 부끄럽고 불안한 욕망들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일부이기도 합니다. 좀 뜬금없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또한 타인들을 공격하고 싶은 욕구인 시기나 질투는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사랑과 사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욕과 공격성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군가를 성적으로 욕망한다는 것, 혹은 누군가를 공격해서 망가뜨리고 싶다는 것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리게 되면 우리의 초자아가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불안, 죄책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연상 작용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무리 말히기 부끄러운 마음일지라도 이러한 주저함을 내려놓고 자유 연상을 통해서 내담자의 마음들을 자유롭게 꺼내볼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무의식을 자유롭게 떠올리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식에 존재하는 마음의 짐들은 그대로 남아서 내담자의 마음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인드맵을 그릴 때 자유롭게 생각을 이어나가듯이, 자유 연상 또한 마음껏 생각을 이어나가면서 무의식에 접근하는 과정입니다.




  자유 연상을 통해서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무의식에 있던 마음의 짐들을 의식으로 꺼내놓을 차례입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언어와 상징과 같은 수단들을 통해서 내담자들이 무의식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언어


  '나는 저 사람을 죽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자신이 살인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나는 저 사람을 성적으로 욕망해요!'라고 말하면 자신이 성범죄자가 된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저 말로 표현했을 뿐인데 실제로 행동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그만큼 언어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위험한 욕망들을 말로써 표현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내담자의 감정이 요동치도록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의 시간은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고되고 불편한 시간이 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만큼 언어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마치 행동한 것처럼 효과를 볼 수도 있습미다. 행동이 아닌 언어만으로도 제반응을 통해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도 있게 되는거죠. 그렇게되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의 스트레스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되고, 내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상징


  직설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상징을 사용해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말보다는 '저 사람을 향해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싶다'라는 표현이, 그리고 '저 사람을 성적으로 욕망한다'는 말보다는 '저 사람을 보면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 초자아를 덜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상징을 통해서 초자아의 검열을 피해볼 수 있습니다. 마치 윤동주 시인이 일제의 검열을 피해서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시를 쓰며 독립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그래서 언어와 상징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 정신분석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들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정신분석은 위와 같은 방법들을 통해서 내담자들을 치료해왔습니다. 현대 정신분석에서는 성적 욕구나 공격성과 같은 욕동들 외에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을 탐색하고자 했던 프로이트의 노력은 현재까지도 유효합니다. 제반응, 자유 연상과 같은 개념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진료실을 찾아오는 내담자들을 치료할 때 유용한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신분석에서는 이유없이 우울하거나 불안한 일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일상이 특별한 이유없이 우울하거나 불안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무의식에 묻혀있는 마음의 짐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의식에 묻혀있는 마음의 짐들도 결국에는 마음의 짐입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스스로 자유 연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나도 몰랐던 마음의 짐을 발견하고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편해질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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