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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Sep 04. 2023

얻어걸린 야구

<사춘기 딸과 함께 야구장을 3>

 사춘기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아이가 어릴 적 주변의 사람들이 말했다. 

“지금이 좋을 때야. 사춘기가 되면 학교 다녀와서 고개만 끄떡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고.”

“자기 애는 사춘기 안 올 것 같지? 하하하. 아니야, 나도 그럴 줄 알았지. 사춘기가 안 오긴 개뿔.”

“사춘기가 오면 말이야, 완전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돼. 마음을 비워야 해.”

“우리 애는 요즘 사춘기라 가족이랑 여행도 안 가려고 해. 주말에도 친구들이랑 약속 잡고 나랑은 안 다니려고 한다니까. 아이가 따라갈 때 많이 데리고 다녀.”


     

대체 사춘기가 뭔데 이렇게 겁을 주는 걸까. 사춘기 아이들은 모두 다 부모의 말은 안 듣고 자기 멋대로만 하는 건가? 어쨌든 겁을 잔뜩 먹은 나는 아이가 사춘기가 되기 전에 가족 문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여름마다 항상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간다든지, 토요일 오전엔 언제나 같이 테니스를 친다든지 하는 자연스러운 루틴 같은 것. 대화의 접점이 될 함께하는 활동말이다. 그러면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든다 해도 가족의 대화는 계속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억지로 될 리가 없다. 만 10세가 되면 주니어 스쿠버 다이빙 오픈워터 자격증을 딸 수 있다. 아이는 그 나이가 되기 전엔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싶어 하더니 막상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나이가 되자 하기 싫다고 했다.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남편과 내가 테니스를 배우러 다니다가 딸도 함께 배우게 됐다. 한 달 배우고 흥미를 갖는 것 같길래 아이에게 맞는 라켓도 신발도 샀다. 토요일 오전 온 가족이 함께 테니스장에 가는 길이 즐겁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4개월 만에 끝이 났다. 딸의 흥미는 금방 식었다. 바로 옆에서 열심히 하지 않는 딸을 보는 건 곤욕이었다. 더 열심히 라켓을 휘두르고, 더 빨리 뛰고, 선생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뭐 그런 투지가 없다. 

“그럴 거면 그만둬.”

“응, 그만둘래.”


     

그만둔다는 딸에게 선생님이 물었다.

“너 엄마가 아니라 친구랑 같이 레슨 받았으면 계속했겠지?”

“네. 친구랑 했으면 재밌게 했을 거 같아요.”

이런. 또래의 테니스 레슨 파트너를 찾지 못한 딸은 결국 그만두었다. 남편은 딸의 라켓과 신발을 당근마켓에 팔았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가 점점 넓어진다. 아이의 방문은 열려있을 때보다 닫혀있을 때가 더 많다. 그러다가 함께 온 야구장. 아이는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난 발야구 룰밖에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왜 아웃된 거야?”

“아. 지금 공이 땅에 튀기지 않고 한 번에 잡았잖아. 그래서 아웃. 그리고 전광판에서 선수 이름 나오고 저 옆에 저 숫자 있잖아. 저건 타율이라고 하는데 저 타자가 얼마나 잘 치느냐를 알려주는 숫자야. 1에 가까울수록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근데 타자가 치는 사람을 말하는 거 맞지?”

“응. 던지는 사람은 투수.”

남편은 오랜만에 아이와 이어지는 대화를 하며 신이 난다. 아이가 묻는 것보다 오버해서 더 많은 걸 알려준다. 평소 같으면 아이가 싫어할만한 대화인데 아이의 질문은 계속됐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데 어찌나 흐뭇하던지.


      

그다음 날인가, 딸이 급하게 날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봤더니, 아이는 자기 인스타를 보여주며 말했다. 

“엄마, 이거 봐, 내가 우리 쪽에서 응원하던 치어리더 언니를 찍어서 인스타에 올렸는데 그 언니가 내 인스타에 와서 좋아요. 눌렀어.”

“오, 좋겠는데!”


그 뒤 아이는 유튜브에서 롯데 자이언츠 응원가와 응원 동작을 보며 익히고 내 핸드폰에까지 롯데 자이언츠 앱을 깔아 놓았다. 어느 선수가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왔는지 KBO 순위는 변동이 있는지 롯데 자이언츠의 근황을 알려준다. 테니스 배울 때 없던 열정이 여기서 터졌다. 아이가 요즘 가장 많이 보는 유튜브는 ‘자이언츠 TV’이고 가장 많이 보는 TV 프로그램은 야구 중계다.      



아이와 그렇게 접점을 만들려고 노력할 때는 접점이 안 생기더니 남편이 좋아하는 야구에 아이가 흥미를 가지게 되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어쩌다 얻어걸렸다.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고 야구 중계를 보는 시간이 즐겁다. 그러나 아이의 흥미가 언제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갈지는 모를 일이다. 그때 아쉽지 않도록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며 누려야겠다. 중요한 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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