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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카당스 Mar 24. 2024

힐링은 저녁 무렵 부엌에서 시작한다

내친김에 먹는 이야기 하나 더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마틸다로 유명한 로알드 달과 더불어 영국 동화 씬(?)을 양분하고 있는 줄리아 도날슨 여사의 작품 중에 "왕과 요리사(The King and the Cook)"라는 동화가 있다. 아이와 함께 읽다 둘이서 완전 빵 터진 재미있는 동화인데, 내용은 이러하다.


먹을 것에 까다로운 왕이 온갖 요리사들을 초대해 요리를 시키지만, 마음에 드는 요리가 하나도 없다. 마지막에 남은 요리사는 겁쟁이 밥(Wobbly Bob)이었는데, 시키는 일마다 무섭다며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엉터리 요리사였다.


왕은 밥에게 영국식 생선튀김인 피시 앤 칩스를 먹고 싶다며 생선을 잡으라고 시킨다. 밥이 상어가 자기를 물까 봐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버티자, 결국 왕 자신이 직접 생선을 잡는다.


이번에는 감자를 캐라고 시키지만, 밥은 개미가 다리를 타고 올라올까 봐 무서워 못하겠다고 버틴다. 결국 왕은 감자도 직접 캔다.


그렇게 모든 요리 과정을 무섭다고 버티는 밥 때문에 왕은 손수 해야만 했다. 그렇게 피시 앤 칩스가 완성되고, 두 사람은 만찬을 즐긴다. 그런데? 왕은 밥에게 최고의 요리였다며, 궁정 요리사 자리를 맡긴다. 본인이 직접 요리를 다 했는데도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잠자리에 들자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거, 내 이야긴데?




우리 집 부엌은 내 공간이다. 보통 부엌은 여자들의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반대다. 요리는 주로 아빠인(남편인) 내가 한다. 동화 속 까다로운 왕처럼 내가 한 요리가 맛있기 때문이다.


시그니쳐 요리도 있다. 갈비찜이다. 마트에서 갈비를 사다 핏물을 빼고, 야채를 넣어 양념과 함께 푹 끓이면 입에서 살살 녹는 갈비찜이 완성된다. 남은 갈비는 얼려놨다가 탕을 해 먹는다. 가게에서 먹는 갈비탕보다 훨씬 고기가 많아서 입이 즐겁다.


아내의 입맛에 맞춰 평소에는 한식을 주로 한다. 된장국, 김치찌개, 제육볶음, 감자볶음 등등. 외국에서는 나물반찬을 하기가 어렵지만 가끔 시금치나물도 해 먹는다. 건강을 위해 삼계탕도 한 번씩 해 먹는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이젠 양식이 더 수월하다. 한국에서는 백화점에 가야 구할법한 재료들이 외국에서는 지천에 널려있다. 처음 미국 슈퍼에서 장을 봤을 때 환호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 백화점 "외국 식재료" 코너가 마치 마트 전체로 퍼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한 동안은 슈니첼에 꽂혀서 거의 매 주말마다 고기를 후드려 팼다. 그거 아는가? 돈가스의 얇은 버전인 슈니첼을 튀길 때 기름에 버터를 넣고 같이 튀기면 풍미가 확 살아난다는 사실을?


파스타는 양식의 기본이지만 사실 외국에서 저렴하고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음식 중의 하나다. 제일 많이 해 먹는 건 역시 시판 소스로 만드는 파스타겠지만, 토마토소스가 지겨워지면 바질 페스토나 알프레도 소스를 넣고 하면 아이가 좋아한다. 치즈가 저렴한 외국이다 보니 치즈를 듬뿍 넣은 라자냐도 끝내준다.


냉장고의 재료가 떨어지면? 마늘과 올리브유만 넣은 알리올리오가 제격이다. 계란이 남았으면 계란국이나 계란말이도 좋다. 글을 쓰면서 입에 침이 고이고 배가 고파지는 것은 그저 단순한 착각일까.


뚝딱 요리를 해서 식탁에 차리고 가족들을 부른다. 맨날 첫술을 뜨기도 전에 맛이 어떠냐 물어본다. 딸내미가 안 먹어주면 가끔씩 삐치기도 한다.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루종일 일하고 나서 부엌에서 요리까지 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고.


그건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얘기다. 냉장고의 재료들을 맛있는 요리로 만드는 것만큼 즐겁고 설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내게는 곧 요리가 힐링이요 즐거움이다. 그렇게 힐링은 저녁 무렵 부엌에서 시작한다.




음식만큼 할 얘기가 많은 것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고 또 그만큼 다양한 취향이 있다 보니, 음식 얘기만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건 얼마 전에 읽은 "미식가의 어원사전"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이다.


터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에 이맘 바일디(Imam Bayildi)라는 것이 있다. 가지 속에 토마토와 양파, 마늘 등을 채우고 올리브유에 지진 단순한 요린데, 요리 이름인 이맘 바일디는 "기절한 이맘"이란 뜻이다.


이맘은 유대교의 랍비처럼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기절한 이맘이라니?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음식을 좋아했던 한 이맘이 올리브유 상인의 딸과 결혼했다. 올리브유 상인답게 커다란 올리브유 단지를 지참금으로 주었다고 한다.


이맘의 아내는 요리를 무척 잘했는데, 제일 잘하는 건 가지 속에 야채를 채우고 올리브유에 지진 요리였다. 이맘은 그 요리가 너무 마음에 들어 아내에게 매일 해달라고 부탁했고, 마음씨 좋은 아내는 매일 그 요리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참금으로 받았던 올리브유가 다 떨어져 버리고, 아내는 이맘에게 그 사실을 전한다. 그러자 이맘은 너무 상심한 나머지 뒤로 자빠져 기절해 버렸다. 그래서 이 요리의 이름이 "기절한 이맘"이 되었다고 한다.


싱거운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알고 이 음식을 먹으면 더 즐겁게 먹을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분명 함께 음식을 나눠먹은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지금까지 내려올 것이다.




밥 짓는 냄새와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풍기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고등어도 한 마리 굽고 잘 익은 김치를 윤기가 흐르는 구운 김과 함께 먹으면 세상에 부러운 게 하나도 없다.


맛있는 음식 = 행복이란 공식이 ‘참’이라면, 저녁밥을 하는 행위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오늘도 나는 그렇게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엌에서 저녁밥을 한다.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유구한 전통의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은 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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