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남 씨가 부크야, 부크야 하고 수 없이 불러주고 어마어마한 사랑으로 복희 씨의 유년을 감싸주었기 때문에 복희 씨가 저를 낳을 용기를 낸 건지도 모릅니다. 복희 씨는 사랑과 자랑이 얼마나 좋은것인지 순남 씨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는 자기가 듬뿍 받아본 것을 제게 듬뿍 나눠주며 중년이 되었습니다. *끝내주는 인생 68쪽ㅡ이슬아
이슬아 작가가 글을 잘 쓰는 것은 증조할머니 덕분이라고 어느 무당이 말했다고 한다.
위의 글에 등장하는 순남 씨가 증조할머니 이름이고 복희(부크)는 어머니의 이름 이라 한다.
증조할머니는 손녀딸이자 훗날 이슬아작가의 엄마가 되는 부크를 마을 사람들 어게 매일 자랑을 하셨다 한다.
밥을 얼마나 잘하는지, 마음씨가 얼마나 예쁘고 야무진지 주야장천 자랑을 했고, 부크 밥이 제일 맛있다고 했고, 어디서든 다 들을 수 있게 부크야, 부크야 하고 부르셨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외할머니랑 친정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께 싹싹했다. 나까지 포함해 외할머니에겐 16명의 손주가 있으셨지만 나를 유독 이뻐해 주셨다.
숙아숙아 불러주셨다.
국민학교 다닐 땐 할머니의 흰머리카락을 뽑아드렸다. 햇볕이 따뜻하고 환한 곳에 베개를 베고 누워계시기도 했고. 앉아계시기도 했다.
하얀 머리카락 하나에 때론 5원일 때도 있었고 10원 일 때도 있었다.
장이 좋지 않으셨던 외할머니는 "꺼억꺼억"소리를 자주 내셨다. 나는 종종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드리곤 했다.
할머니는 찰밥이랑 죽을 자주 해 드셨다. 찰밥이 부데끼않고 든든하시다고 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종종 흰 죽을 끓이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 친척 어른들과 동네 어른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때는 사실 몰랐다. 그때 받은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나이 오십이 넘어 만난 사람들과 그 이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른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자랐는지에 대해 듣게 되었다. 심지어 사십 년을 알고 지낸 친구가 어려서부터 가족들에게 학대당하고 가스라이팅 당했다는 것, 어른이 돼서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게 지금까지 욕으로 학대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앙이 무척 깊은 친구였는데 종종 자녀들에게 욕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들을 딸에게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금전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으나 (사실 나는 궁핍을 느끼지 못했다) 다정하신 부모님께 사랑받았다. 남동생이 두 명 있는데 나에게 함부로 대한적이 없다. 나에게 완전 반말은 하지 않는다. 존칭과 반말이 섞인 중간의 말을 한다.
학교 다닐 때 남동생한테 매 맞는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늘 친구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난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행복했다. 하지만 국민학교 다닐 때 딱 두 가지가 부러웠다. 1층 사는 친구의 피아노와 중학교 동창의 방에 있던 침대.
지금은 침대가 흔하다. 우리 집에도 하나가 있다.
하지만 40년 전에는 침대와 피아노는 일종의 부의 상징이었다.
아버지 월급날이 신문지에 싸인 돼지고기를 먹는 유일한 날이었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늘 많은 사람들 속에서 행복했다. 아마도 그 시절 넘치게 받았던 사랑 덕분이었나 보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만큼 사랑을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그래도 예의 바르고 측은지심을 아는 어른으로 크고 있어 너무 고맙다.
지금도 부모님의 사랑은 여전하시다. 거기에 남편의 사랑까지 보태졌으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