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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다 Mar 27. 2020

내 집 마련보다 시급한 내 방 마련하기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몇 살이라도 어렸을 때는 집 나가면 재밌고 신나는 일이 많지 않을까, 부모님의 잔소리를 벗어나서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하며 개고생을 해보지 않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수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물론 지금도 사회에서는 새파랗게 어린 나이지만, 이제는 20대 후반의 나이로 한국을 떠나 세상을 맞서 보니 저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했다. 밴쿠버에서 살면서 인생에 대한 교훈을 여러 방면으로 많이 배웠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온전히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내 공간, 바로 을 마련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점을 아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 가장 걱정되는 문제는 물론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 몸이 지낼 곳을 구하는 곳이다. 나의 경우는 평생 살 집도 아니고, 고작 길어야 1년 정도 살게 될 집을 구하는 것이 큰 과제였는데, 그 과정이 꽤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단기 여행이야 호텔이나 숙박업체에서 지내면 되지만, 장기적으로 머물다 보니 요리도 해 먹어야 하고, 도 자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며, 어학원을 다니니까 숙제도 하고 공부할 책상도 있는 나의 방이 필요했다. 


초반에는 낯선 곳에서 집을 구하다가 사기를 당하며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안전하게 어학원에서 연결된 홈스테이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내보니 역시 남의 집에서 얹혀사는 것이 영 편하지가 않아서 집 구하기에 나섰다.




한국에서 을 구해본 적은 없지만, 밴쿠버에서 집을 구하면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집을 구하기까지 한 달 내내 하루 종일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세입자를 구하는 글을 구한다는 글을 하나하나 다 읽어보았다.


밴쿠버는 렌트 값이 정말 비싸기 때문에 보통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은 방을 렌트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내가 살 방 하나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선, 올라온 집 사진을 보면서 마음에 들면 직접 보러 가는 뷰잉 예약을 잡는다. 그런데, 그 뷰잉 예약을 잡느라 문자를 하는 사이에 이미 집이 계약되는 일도 빈번했다. 혹은 뷰잉 예약 날이 돼서 집을 보러 가는 길에 죄송하다며 다른 집 보러 온 사람이 벌써 계약을 했다며 나의 헛걸음에 속으로 욕을 하며 아쉬움의 답장을 보낸 일도 꽤 많았다. 이렇게 집 구하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집을 보러 다니면서 나는 나만의 체크 리스트를 만들었다. 가격은 어느 정도인지, 한국과 다른 건축 방식에 집의 바닥은 카펫인지 마룻바닥 인지도 꼼꼼히 확인했다. 카펫 바닥은 먼지와 머리카락 청소가 힘들고 물이나 오염되기 쉬운 것이라도 흘리게 되면 나중에 방을 빼면서 청소비를 물어줘야 하는 단점도 있어서 최대한 피했다.


여성전용 셰어하우스를 찾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남성과 같이 살아본 적이 없다.

따라서, 남성과 같이 한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했고 상상도 안됐다. 그 남들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도 끔찍했다. 그런데, 밴쿠버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세입자들이 모여 살아서 여성전용 집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소인원만 살고 있는 집을 찾았지만, '닭장집'이라 하는 한 집에 6명, 5명씩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세입자가 많으면 공용공간을 사용하는 시간이 겹치게 되면 정말 불편하고, 무엇보다 나는 조용한 공간을 선호했기 때문에 3명 정도의 적당한 인원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내가 원하는 조건을 설정하고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서 직접 보러 가면 세부적인 조건에 맞지 않아서 좀 더 고민해보겠다며 계약을 안 하고 또 새로 올라온 세입자를 구하는 글들을 보며 내 방 찾기에 눈에 불을 켜고 집중했다. 



출처 : 구글

집을 보러 가면 가관이었다. 부엌을 보다가 토스트기에서는 청소를 언제 했는지 예상도 할 수 없게 검게 그 으른 빵 찌꺼기들이 개미처럼 모여있었다. 화장실은 언제 청소를 했는지 모르게 검은 물 때들이 범벅이 되어있었다.


쓰레기통은 넘치기 일보직전이었으며 부엌에서는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어떤 집은 창문에 방충망이 없었고 잠금장치도 없어서 너무나 무서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2층 집이었는데 혹시나 창문으로 누군가 내 방에 들어오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불안감에 당장 방에서 나왔다.


어떤 집은 초록병들과 맥주 캔들이 쓰레기통 주변에서 탑을 쌓고 있었다. 아마 이 집은 세입자들끼리 모여서 술 파티를 벌이나 추측을 했다. 나는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었지, 술 파티를 벌이며 시끄러운 활동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 집도 걸렀다. 


여러 집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집이 없어서 그냥 홈스테이에 계속 머무르기로 마음을 먹고, 마지막으로 다시 세입자 구하는 게시판을 살펴보다가 깔끔한 침대보가 있는 침대 사진이 눈에 띄는 글을 보게 되었다.

글을 보고 바로 연락을 해서 다음 날 집 뷰잉 예약을 잡았다.




이 집은 다운타운에서 대중교통으로 20분 정도 걸렸고, 주변에는 대형 쇼핑몰이 있어서 편의시설에서는 1등이었다. 근처에는 도서관도 있고, 아시안 마트, 한인 마트도 있어서 살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동네였다.


집 앞에서 집주인과 만나 간단히 소개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집주인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약간은 까탈스러움이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었다.


집을 보니, 새 집처럼 깨끗하고 내가 간절히 찾던 고정식 샤워기아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샤워기가 있는 화장실이 있었다. 다른 집들과 달리 처음 세입자를 받는 집이라서 침대도 가구도 모두 상태가 아주 좋았다.

또, 여성전용이고 총 3명이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말에 너무나 맘에 들었다.


내가 살게 될 방을 보니 침대, 옷장, 책장, 수납장이 있었다. 한국에서 살던 방보다 커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내가 살게 될 방을 찾아서 행복했고, 바로 집 계약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집주인은 나보다 먼저 집을 보고 간 사람이 계약 의사를 밝혔고, 그 사람의 확실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며 나에게 그 사람과 다시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지금 당장 계약을 하고 싶고 보증금도 줄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지만, 순서가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또 이렇게 집 구하기에 실패했고,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어제 집을 본 주인이 나와 계약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계약 의사를 밝혔던 사람이 입주일이 늦어질 것 같다고 해서 결국은 좀 더 빨리 입주가 가능한 나와 살고 싶다고 했다. 너무나 행복했다. 드디어 내가 살게 될 방을 구했다. 학원이 끝나자마자 살게 될 집으로 가서 간단하게 계약서를 작성하고, 보증금을 입금했다.


드디어 을 구하고 나니까, 갑자기 엄청난 힘이 솟아 앞으로 밴쿠버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했다.

이사를 하기까지 2주가 남았고, 홈스테이에서 지내는 2주의 시간이 2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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