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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어린아이로 만드는 사람

by 윤모음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 첫눈도 참 요란스러웠다. 환기를 하려고 잠시 열어둔 거실 창 사이로 바깥의 소음이 넘어 들어왔다. 대부분은 어린아이들이 내는 높은 음의 돌고래 소리였다. 창틀에 팔을 걸고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하얀 눈밭을 마음껏 헤집으며 마음껏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는 눈싸움에 열중하는 중이었고, 누군가는 아빠가 끌어주는 눈썰매에 올라타 있었고, 누군가는 눈오리와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귀여운 장난감 마을에 온 듯한 풍경이었다. 진짜 겨울이구나, 싶은 모습들이었다.


우리 부부는 어린아이가 유독 많은 곳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동네 전체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낀다. 어딜 가나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눈 위에서 통통 뛰는 장난기 가득한 발걸음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광경들은 그 공간에 함께 있단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면 곳곳에 모양도 표정도 제각각인 눈사람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작년에는 눈사람들을 구경하며 걷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더라? 그런 질문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재빨리 걷고 있던 발을 뚝 멈췄다. 그리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구남친, 현남편에게 외쳤다. “나도 눈사람 만들래! 지금 당장!” 사뭇 진지했던 내 선언에 남편은 당황한 채 웃음이 터졌다. 결국 우리는 눈밭으로 뛰어 들어가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30cm 정도 높이의 크지 않은 눈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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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모을 때마다 손끝은 점점 빨갛게 얼어갔고, 나는 손이 시려서 자꾸만 꺅꺅 비명을 연달아 지르게 되었다. 눈사람의 몸통을 완성한 후에는 바닥에서 주워 온 나뭇잎과 조약돌로 눈·코·입을 만들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게 아닌데 자꾸만 싱글벙글거렸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꾸 하늘로 들썩들썩 올라갔다.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만들어본 눈사람이었다. 그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역시 노는 건 아이처럼 놀아야 제맛이라는 걸. 그리고 아주 잠깐이긴 해도, 내가 이 사람과 있을 때면 종종 어린아이가 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계속된 폭설로,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눈오리 사진들이 많이도 올라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좋아요’만 누르고 말았을 텐데, 갑자기 충동적으로 나도 갖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해보면 재밌겠단 마음 때문이었다. 결국 눈 집게를 종류별로 주문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집에 놀러 갔던 어느 늦은 겨울밤, 가방에 숨겨져 있던 눈오리 집게를 당당하게 꺼내며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해보자!”라고 외치며.


그 형형색색의 집게를 한번 사용해 보겠다며 우리는 새벽 4시에 호들갑을 떨며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눈이 내린 지는 이미 오래였고, 곳곳에 뿌려진 염화칼슘으로 눈이 쌓인 곳은 잘 보이질 않던 날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행히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한쪽에 눈이 폭닥하게 쌓여있는 곳을 발견했다. 우리는 보물을 찾은 것처럼 환호성을 지르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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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집게는 처음 사용해 보는 거였다. 그래서 만드는 모양들이 모두 영 시원치가 않았다. 곰돌이는 귀를 잃었고, 우주인은 몸과 얼굴이 분리되기 일쑤였다. 그 우스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뭐가 만들어지긴 한다는 것이 재밌어서 신이 나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아주 조금 새어 들어오는 골목에 쭈그려 앉아, 눈을 뭉쳐 만들며 그와 나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함께 있을 때면, 우리는 종종 어린아이가 된다. 어딜 가서는 절대 낼 수 없는, 서로에게만 한정된 혀 짧은 말투로 대화를 한다. 오랜만에 마주치면 엉덩이를 흔들며 마주 보고 춤을 출 때도 있다. 가만히 있다가 서로의 볼과 팔을 왕왕 깨물기도 하고, 먹을 걸 서로 먹여주면서 줄 듯 말 듯 약을 올리기도 한다. 편의점에서 새로운 맛의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발견하는 날에는, 종류별로 사 와서 ‘우리만의 시식회’를 연다.


나를 무해하고 순한 마음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로 되돌려놓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꽤나 짜릿하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의무와 책임으로 가득한 팍팍한 어른의 삶 속에서 말이다.


앞으로도 눈이 올 때마다, 나는 남편과 어딘가에서 또 엉뚱한 짓을 벌일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는 내 키만 한 눈사람을 만들 수도 있고, 어쩌면 서로 깔깔 거리며, 눈썰매를 힘껏 끌어주며 탈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다면, 어른들도 아이처럼 놀 수 있다는 거. 우리의 어린 마음은 영원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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