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이 말하는 괴물
처음으로 소희 씨의 집에 초대되었다. 공원 주변에 위치한 깔끔한 주거형 오피스텔이었다.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희 씨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깊은 어둠이 피어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소희 씨는 용기를 낸 듯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문자를 확인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대충 봐도 저질스러운 문자가 계속 오고 있었다. 이미 알림이 40통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진동이 울린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단 이 상황에서 소희 씨를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잠시 거리를 둬야 할거 같았다.
난 그녀의 핸드폰을 가지고 현관문 밖에 복도로 나왔다. 문자의 내용을 천천히 훑어봤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내용들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읽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부서지고 내 영혼이 상처 입는 것 같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같은 사람으로서 이런 일방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소희 씨를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거기에 소희 씨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본인의 세상에서 마음대로 생각하고 재단한 저질스러운 광기만 가득했다. 그렇게 나의 얼굴이 굳어질 때쯤 소희 씨 핸드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스토커였다. 난 차분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너 누구야? 어제는 커다란 케리어 끌고 외출하길래 어디 멀리 여행 가는 건가 해서 하루종일 걱정했더니 남자를 집에 들이네. 지금까지는 괜찮았어. 난 보상받으려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난 정말 소희를 위한 것뿐이니까. 그리고 솔직히 소희 도 남자에게 관심 없었던 거 알아? 대학교 때는 여자 좋아한다고 소문 다 났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남자를 끌어들여? 이러면 나를 속인 거잖아. 너 같으면 이렇게 배신당했는데 참을 수 있어? 신고하려면 해. 난 겁안나. 이런 일로 얼마나 처벌받을 거 같아? 그런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야. 내 마음은 이미 강해져 있어. 그거 알아? 받을 생각 없이 주기만 하는 순수한 사랑. 말 좀 해봐. 표정이 왜 그래?”
마치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내 핸드폰을 꺼내서 플래시를 켰다. 그리고 주변을 비춰보면서 둘러보았다. 현관문의 바로 맞은편에 있는 소화전의 사이로 작은 빛이 반사되는 게 보였다. 난 다가가서 몸을 숙이고 소화전을 열어보았다. 모서리에 작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게 보였다. 난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이 카메라로 보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오늘 소희 씨가 나와 함께하는 걸 보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거였다. 난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조잡하게 감춰놓은 몰래카메라 앞에 서서 렌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스토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집안에는 없어. 내가 그렇게 더러운 사람은 아니야. 말했지. 내 사랑은 순수하다고. 나는 그냥 집에 잘 들어가는지 지켜만 보려고 한 것뿐이야. 혹시 지금 더러운 생각한 거 아니지? 니 표정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알 거 같네. 말 좀 해봐. 왜 말이 없어? 너 겁쟁이구나.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순결한 소희 씨랑 있는 거지? 난 문밖에서 지켜만 보는데 너는 집안에 들인다고? 양심이 있으면 이렇게 몇 년씩 헌신하는 내 마음도 한 번쯤 알아줄 수도 있는 거 아냐?”
난 이미 이성을 잃었다. 내 정신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잠시 겪은 것뿐이지만 난 이 공포를 마주하고 있었다. 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결심을 했다. 난 이 괴물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그 더러운 입에 소희 씨 이름 올리지 마. 그리고 분명히 네가 말하라고 한 거야. 너 스스로 선택한 거야.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은 네 선택의 결과야. 너의 말과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겠지? 너의 죽음으로 그 죗값을 받을 거야.”
그 스토커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나를 죽이기라도 하게? 걱정 마. 나는 죽는 건 겁나지 않아. 다만 내가 죽으면 소희가 슬퍼지겠지. 지금은 날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죽으면 바로 슬퍼질걸? 뭐든 가지고 있을 때는 그 가치를 모르지. 바보같이 잃고 나야 알 수 있다니까. 내 순애보가 얼마나 퓨어한지. 하지만 난 소희가 슬퍼지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 알아?”
난 그 괴변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난 통화를 종료하고 변호사 아저씨에게 문자로 현재 상황을 알렸다. 곧 경찰이 도착했고 나는 몰래카메라 위치를 전달 후 간단한 절차만 마치고 소희 씨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무엇보다 나는 소희 씨를 지켜야 했다. 그녀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고 싶었다. 난 할 수 있는 모든 상상을 동원해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내 결심을 오늘 깼다. 절대 말하지 않기로 한건 살인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번에는 사고가 아니다. 실수도 아니다. 난 내 의지로 말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스토커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내 목소리를 들은 스토커가 죽지 않는다면 내 저주도 끝난 것이 확인되는 것이고 그러면 이제부터 난 소희 씨에게 매일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
오늘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소희 씨를 아끼는 마음에 겉으로는 괜찮은 척 웃으며 그녀를 위로해 주었지만 난 오늘 하루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난 스스로 결심을 깼지만 너무 두려웠다. 정말 스토커가 죽는다면 난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거실에 설치한 텐트도 어쩌면 혼자 있기 무서운 나를 위한 것이 분명하다. 난 혼자 이 밤을 보내기가 너무 무서웠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난 감당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할 수 있을까? 난 그렇게 한숨도 자지 못하고 괴로움에 뜬눈으로 밤새고 아침을 맞았다.
이후에 나는 소희 씨의 출근길과 퇴근길을 함께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정도가 다였다. 나에게 연신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소희 씨는 정작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모를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아저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단 다행히 소희 씨 집안에서는 몰래카메라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자세한 일처리와 결과를 상의하기 위해서 오늘 집에 방문해서 소희 씨와도 의견을 나누었으면 한다고 하셨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사건이 어느 정도 일단락될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 내 저주는 끝난 게 아니었다. 아저씨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 스토커가 며칠 전 사고로 사망해서 사건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저씨가 나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을 때쯤 소희 씨가 방에서 나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스토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색이 되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저씨가 소희 씨 뒤를 따라나가며 말했다. “아마도 소희 양이 나에 대해서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아. 소희 양 아버지가 우리 법무법인의 중요한 고객이셔서 내가 몇 번 소희 양을 마주친 적은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피하더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직접 오해를 풀게.”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오로지 내 머릿속은 내가 살인자가 되었다는 사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단 며칠의 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잠시 꿈을 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현실로 돌아온 이상 지금 그녀를 떠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내 저주가 이제 확실해진 이상 계속 소희 씨와 함께할 수 없다. 나 때문에 소희 씨가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나만 있는 집이 이렇게 적막한 줄은 몰랐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꿈을 꾼 거 같다. 난 문자 한 통 보낼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바보였나?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 이런 식으로 끝난다고? 그날 소희 씨는 왜 갑자기 나가버린 걸까? 이유조차 물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유를 안다고 해도 내가 소희 씨 곁에 있을 수 없게 된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난 정말 바보 같다.
도대체 왜 나는 이런 저주에 걸린 걸까?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그리고 할머니도. 나는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 난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졌고 결국 그 스토커에게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겁쟁이가 되었다. 제발 내 목소리를 들은 그 스토커가 살기를 바랐다. 제발 살아서 내 저주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지없이 죽었다.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난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었다는 걸 느꼈다. 다만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소희 씨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리브를 맡겨야겠다. 맞다. 내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였던 리브를 나보다 더 사랑해 줄 사람이 생겼으니까. 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리브를 맡기기 위해서 소희 씨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거기에서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인걸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마음이었다.
[ 15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