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고백
괴물이 나타나고 며칠 동안 지훈 씨는 나의 출근과 퇴근길을 함께해주고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특별해진다. 오늘은 퇴근하고 지훈 씨가 말하는 변호사 분께서 스토커 관련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고 했다.
그렇게 오늘도 기분 좋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훈 씨가 말한 그 변호사를 보는 순간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난 이정훈 변호사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그의 음침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도 들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소수의 상류층만 알고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사는 사람들이다. 지훈 씨를 돌봐주는 변호사가 어째서 이런 무서운 사람일까? 나는 아버지의 그런 비밀을 알게 된 후 그 무서운 세상에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훈 씨는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까? 왜 그런 사람과 관계되어 있을까?
이정훈 변호사는 나에게 마치 다행이라는 듯이 괴물의 죽음을 알렸다. 나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이 일을 알린 건 저 변호사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괴물의 죽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절대 자신의 것에 누군가 흠집을 내는 걸 용서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난 진실을 알아야 했다. 내가 참을 수 없어서 집밖으로 나서자 그 변호사가 나를 따라 나오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지훈이 집에 출입하는 사람은 제게 보고가 되어서 소희 양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통해서 몇 번 뵌 적이 있었던 거 같은데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혹시 지금 이 상황은 모두 아버지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회장님 하고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전 오래전부터 지훈이를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소희 양이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오해요? 내 어머니의 죽음과 당신이 관련 없다는 건가요? 정말 결백하다면 사건을 다시 조사해서 나에게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럼 믿어드리지요. 그전까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만 비켜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다.
본가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나의 창백한 모습을 본 새엄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부 설명했다. 새엄마는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늦게 아버지가 도착했다.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혹시 아버지세요? 그 스토커 사망과 관련이 있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 설마 내가 사람을 죽이라고 사주라도 했다는 것이냐? 내가 아무리 너를 아낀 들 그렇게까지 할거 같으냐?”
“나 때문이 아니겠죠. 아버지 평판 때문 아니에요? 감히 아버지 것을 건드린 사람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어쨌든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 죽음도 조작했나요? 엄마는 분명 이 집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왜 별장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죽었다고 사건 결과가 발표된 거죠?”
“소희야. 네가 그때는 너무 어려서 충격을 크게 받아서 그래. 분명 너희 엄마는 별장 근처 계곡에서 너랑 물놀이를 하다가 빠져 죽은 거다. 그때 왜 수영도 못하는 네 엄마가 물에 들어갔던 거지? 혹시 너랑 관련이 있는 것이냐? 그래서 그렇게 거짓말하는 거야?”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때 너는 어렸어. 그리고 마음도 여렸고. 너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힘들어서 넌 스스로 기억을 왜곡해서 기억하는 게 분명하다. 여기 경찰 조서와 너희 엄마 부검결과다.”
아버지는 금고에서 몇 가지 서류를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보면 분명히 네 엄마 사인은 익사라고 되어있지? 이래도 내가 거짓말하는 것이냐? 제발 이제 정신 좀 차려. 그 편집증적인 상상 좀 그만하고. 내가 그놈의 스토커인지 누군지 어떻게 알고 죽인다는 것이냐? 이러면 나는 너를 병원에 입원시킬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순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캐묻는다고 대답할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정말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지도 모르니까. “알겠어요. 그만 나가볼게요.” 정말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난 분명히 기억한다. 매일밤 그날을 살았다. 그런데 내 기억이 가짜라고? 나는 엄마의 부검결과와 경찰조사의 결과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내가 스스로 기억을 왜곡한 것일까?
그날부터 나는 과거로 돌아갔다.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나자 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나는 너무 힘들었고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나는 새엄마의 도움으로 임시거처에서 잠시 머물 수 있었다. 새엄마는 매일 나를 안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힘들 때도 지훈 씨는 연락이 없다. 날 잊은 것일까? 난 매일 이 고통 속에서도 지훈 씨와 다애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매일 생각했다. 정말 내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혹시 정말 나 때문에 엄마가 물에 들어갔던 것일까? 솔직히 그런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내가 오해한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이정훈변호사와 관련된 지훈 씨도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게 될 테니까.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지훈 씨도 속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 지훈 씨도 위험한 상황이 아닐까? 내가 너무 성급했나?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말도 없이 그를 떠나버렸으니까.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오늘도 퇴근시간이 되고 병원을 나설 때쯤 익숙한 지훈 씨와 다애가 보인다. 바보같이 이제야 나타나다니. 다애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고 모른 척 길을 걸었다.
내 뒤를 따라서 지훈 씨와 다애가 걷는다. 나는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훈 씨의 집으로 가기에는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 그는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우리는 눈부신 석양이 비치는 한강의 다리에 서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다리의 난간을 올라서며 그에게 말했다. "지훈 씨 만약 내가 살고 싶지 않아서 지금 죽을 거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지금이 내가 살아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뜻밖에 지훈 씨의 사과를 받았다.
"미안해요. 그러니까 스스로 죽지 말아요. 할머니가 늘 말했어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편히 눈감지 못한다고. 그러니까 스스로 죽지 말아요. 소희 씨가 어릴 적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말했어요. 사과하라고. 기억해요? 그때 미안했어요. 리브를 돌려주지 않아서. 그러니까 스스로 죽지 말아요. 어차피 이제 소희 씨가 죽는다면 나 때문에 죽은 사람으로 나는 기억할 거예요. 내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 죽었으니까. 어차피 나 때문에 죽을 거니까 그만 내려와요. 위험해요."
예전에 들어봤던 목소리 그대로였다. 어린 시절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사실 그의 뒤를 따라갔었다. 정신없이 달리다 넘어지며 아파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어른이 되어 처음 공원에서 마주쳤을 때 '리브야'라고 부르던 그 짧은 목소리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불리기를 너무 오래 기다렸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훈 씨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했죠? 그럼 나도 곧 죽겠네요. 그러면 죽기 전까지 내가 하자는 거 다해요. 지훈 씨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그는 나에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어차피 저도 오늘 죽을 생각이었어요.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전까지 하자는 대로 다할게요. 가장 먼저 뭐가 하고 싶어요?" 나는 대답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있어야 하는데." 그는 한참을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더니 말했다. "혹시 배고파요? 밥 차려줄까요?" 내가 기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면 괜찮은 답이었다. 다시 지훈 씨가 날 집으로 초대한 것이니까.
[ 16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