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이 기억하는 괴물
우리는 밤의 공원에서 손을 잡고 걷는다. 이 순간 여기에는 우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람의 온도에서 오는 따뜻한 감각이 내 마음과 연결되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든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마음이 전해질만큼 나는 그의 손에 구속되어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깊은 안정감을 준다. 그렇게 집 근처를 지날 때쯤 나는 방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제 방이 이 근처인데 잠시만 들려도 될까요?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필요한걸 다 못 챙겼어요. 잠시면 되는데 괜찮죠?”
행복한 시간이 찾아온 것 같았지만 얼마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려고 하면 그 불행은 여지없이 나를 찾아왔었으니까. 내 방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온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계속 울리는 진동에 나는 두려워졌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문자가 오는 속도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다. 한동안 나를 괴롭게 했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울려대는 핸드폰의 진동이 말해준다. 한동안 잠잠했던 괴물이 돌아온 것이다. 여러 번 경찰에 신고했지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적이 없고, 주변을 맴돌 뿐이라며 법원에서 접근금지 명령만 받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그 괴물에게서 벗어난 줄 알았다. 몇 년째 조용했었으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울리는 진동에 나는 두려워졌다. 그 괴물은 이상한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자신은 나의 답장을 바라지 않는다고. 그냥 지켜보며 혼자서 좋아하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내 주변을 맴돌며 나를 지켜본다. 너무 힘들고 공포스러울 때는 그 괴물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안 좋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만약에 내가 빈틈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상대는 그런 나를 파고든다. 절대 약한 모습 보여서는 안 된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니까. 난 절대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어떤 감정을 보이든 그 괴물은 그 감정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한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그렇게 말하면 말할수록 더 나에게 파고든다.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불안을 눈치챈 다애와 그런 나를 지켜보는 지훈 씨 때문이다. 난 지금 약해져 있다. 혼자서 버텨내야 하지만 나는 지금 그들에게 기대고 싶었다.
난 그 괴물의 문자를 내가 읽는 대신 지훈 씨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차분히 문자를 읽어가더니 내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난 방 안에서 다애와 둘이 남겨졌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는 그 저질스럽고 악질적인 문자를 보지 않았지만, 나 대신 그 저질스러운 글을 지훈 씨에게 읽게 한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난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했지만 오늘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내 손을 잡아준 지훈 씨 때문일까? 나는 다애를 안아주며 나도 위로해 주었다. 잠시 후 돌아온 지훈 씨가 내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잠금화면 위로 메시지 알림이 보인다. 거기에는 다행히도 지훈 씨의 이름이 보였다. 그가 보내놓은 문자였다.
[제가 잘 아는 변호사님께 부탁해 놓았습니다. 당분간은 여기에 혼자 오지 마세요. 상황이 어느 정도 종료되면 집 이사도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아저씨가 이미 신고해서 경찰이 곧 도착한다고 해요. 잠시만 저랑 여기 있으면 돼요. 그 이후의 일처리도 아저씨가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잠시 후 경찰이 도착하자 그는 간단한 절차만 끝내고 다시 한번 내 손을 잡고는 밖으로 이끈다. 첫 번째 잡았던 손은 설렘이었다면 두 번째 잡은 손은 안정감을 주었다. 같은 사람의 손이 이렇게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는 게 나는 신기했다. 지훈 씨는 손이 조금 차다. 차가운 손을 잡고 있으니 불안한 내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지훈 씨의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나오자 그가 시원한 물을 건넨다. 물에서는 조금 탄산이 느껴졌다. 물을 마시며 주변을 돌아보자 거실에는 작은 텐트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텐트들은 뭐예요?" 그는 말대신에 나를 거실의 의자로 이끈다. 의자에 앉자 그는 헤어드라이기를 가져와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손에 든 시원한 유리잔과 따뜻한 헤어드라이기의 바람 그리고 차가운 그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잠깐씩 세상은 멈추고 다시 흘러갔다. 익숙한 그의 손길은 아마 다애를 위한 것이겠지. 내 앞을 서성이는 다애를 보며 조금 질투를 느꼈다. "한번 해주면 평생 해줘야 한다고 했죠? 이제 내 머리카락은 지훈 씨가 말려줘야 해요."
한참 머리를 말리고 나자 차려놓은 식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식탁에 마주 앉아서 미역국에 몇 가지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따뜻한 미역국이 목으로 넘어갈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난 잘 참아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거실에 펼쳐진 2개의 텐트 앞에 섰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어릴 때 무서운 꿈을 꾸거나 힘들어하면 할머니는 꼭 이렇게 거실에 텐트를 쳐주셨어요. 나는 할머니랑 같이 자려고 했지만 언젠가 혼자가 될 나를 걱정해서 그러셨던 거 같아요.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셨어요. 이건 같이 자는 것도 아니고 따로 자는 것도 아니라고.]
나는 그 상황이 상상되어 잠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텐트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훈 씨 오늘은 다애가 누구랑 잘지 직접 선택하라고 하죠." 어제도 내가 다애를 차지했었지만 오늘은 정말 혼자 잠들기 힘들었으니까. 나는 다애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애야. 나랑 지훈 씨 중에서 누구랑 같이 잘래?" 내 말을 듣고 있던 지훈 씨는 말없이 왼쪽 텐트를 열고 다애를 들여보내주었다. 그리고 오른쪽 텐트로 들어가 버린다. 내가 텐트에 들어가 눕자 다애는 내 머리맡에 물고 있던 인형을 떨어뜨리고는 내 팔을 베고 눕는다. 인형에서는 다애의 침냄새가 났다. 다애가 가장 아끼는 애착인형을 선물 받자 나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때 다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처음 리브가 우리 집에 왔던 날을 기억해요. 난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소희 씨도 오늘밤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소희 씨는 정말 괜찮을 거예요.]
그의 말이 나의 무언가를 건드렸던 거 같다. 내 안에 쌓아놨던 무언가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지훈 씨 내가 비밀 한 가지 알려줄까요? 사실 내 친엄마는 자살을 했어요. 그런데 더 슬픈 건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서 사인을 조작했다는 거예요. 지방에 있는 별장에 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죽은 걸로 꾸몄어요. 엄마는 죽음의 순간까지 자유롭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니까. 자신의 명예나 평판이 엄마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사람. 난 엄마가 죽은 그 집에서 살았어요. 난 그런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싫어졌으면 지금 말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한번 하면 평생 해줘야 한다면서요. 소희 씨 밥 차려줘야지 어딜 가겠어요.]
팔을 베고 누운 다애의 온도가 느껴진다. 난 그 따뜻함에 이내 잠이 들 것 같았다. 나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누군가에게 나누었다. 나의 아픔은 줄었지만 그는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진 걸까? 난 그의 손을 잡는 게 얼마나 내 맘에 안정감을 주는지 알아버렸다. 나도 그의 아픔을 나누고 싶어졌다. 나도 그에게 힘이 되고 싶어졌다. 나는 전하지 못한 말을 삼키고 깊은 잠에 들었다.
[ 14화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