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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안 Dec 13. 2024

극한 파일링

지금까지 이런 근관은 없었다. 이것은 길인가, 벽인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일은 치과의사들에게 낯설지 않은 일이다. 특히 신경치료(root canal treatment)를 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근관의 끝을 향해 파일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을 때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인디아나 존스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손끝의 미세한 감각만이 유일한 나침반이다.


 근관의 형태는 사람마다, 치아마다 모두 다르다. Vertucci의 분류법에 따르면 근관의 형태는 8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변형이 존재한다. 두 개의 근관이 하나로 합쳐지거나, 하나의 근관이 둘로 갈라지기도 하며, X자 교차 형태로 만나기도 한다. 대들보처럼 곧고 길게 뻗은 근관이 있는가 하면, S자 곡선으로 휘어진 근관도 있다. 심지어 C자 형태로 감싸 안는 모양의 근관도 발견된다. 근관이 이 정도로 개성 넘치다면, 사람의 성격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MBTI가 같은 사람도 성격이 조금씩 다르듯, 치아도 똑같은 치아는 하나도 없다. 한 입 안에 자리한 약 28개의 치아들 또한 천차만별로 모양과 구조가 다르기에 예측할 수 없는 변수 속에서, 마치 고고학자가 화석을 발굴하듯 근관의 미로를 하나하나 탐색하는 작업은 늘 새롭다.



 신경치료에서 사용하는 파일은 가늘고 섬세하다. 특히 곡선형 근관을 만날 때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처음에는 아주 얇은 파일로 접근해야 하며, 저항감을 느끼면 파일을 뺀 후 다시 세척하고 재시도해야 한다. 급한 마음에 힘을 주면, 파일이 부러질 확률이 높다. 부러진 파일은 근관 속에 끼어버려 제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된다. 여기서 깨닫게 된다. 아무리 급해도 빨리 가려는 욕심은 대체로 일을 망친다.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지만, 그럴수록 더 큰 저항에 부딪히고 만다. 신경치료 파일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된다. 억지로 뚫으려는 순간, 파일이 부러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와그작 부러질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힘을 빼고, 천천히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 계발서에서 많이 봤던 말이긴 하지만, 치과에서도 통하는 걸 보면 진리인 듯하다.


 곡선의 근관일수록 가는 파일로 시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길잡이가 되는 통로를 만들어 서서히 크게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가면서 서서히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파일의 두께를 점진적으로 늘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도, 큰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작은 성취들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굽은 길을 돌고 돌아가야 하지만, 그 길이 오히려 우리를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줄 때가 많다.




 파일링의 과정은 의사의 인내심과 섬세함을 시험한다. 어두운 근관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탐험가의 마음처럼, 우리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손끝의 감각만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리하지 않고, 힘을 빼고, 흐름을 느끼며 조용히 전진하는 것. 결국 치과의사의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이 작은 여정은 우리 살아가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보이지 않는 길을 손끝의 촉각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과정, 파일이 부러지지 않도록 인내하며 끝까지 몰입하는 과정, 예상치 못한 곡선의 근관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 이 모든 것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쯤 되면 치과의사는 탐험가이자 명상가이자 인생 코치라고 할 수 있겠다.


 신경치료의 파일은 오늘도 손끝에서 미세하게 떨린다. 진료하듯, 인생의 곡선길을 따라 힘을 빼고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 서두르지 말자. 직진만 길이 아니다. 곡선도 길이다. 마음의 GPS에 꼭 추가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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