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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Oct 26. 2020

분홍빛 소금물 대야에 두 발을 담그면

소금물에 사랑을 담아 딸의 발(足)병을 고친, 우리 아부지 이야기

곰돌이 패턴의 마스크 위로, 까만 눈을 반짝이며 한 남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약국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아이의 버켄스탁 샌들을 뒤로 젖혀, 하얀 발가락이 잘 보이도록 내 쪽으로 아이의 발을 내민다.


"여기 이렇게 뭐가 올라왔어요.. 티눈인지 사마귄지 모르겠는데, 병원에서는 지져서 없애자고 하는데 얘가 너무 무서워해서 처방만 받아 왔어요."


아이의 발가락에 조그만 쌀알 같은 것이 볼록 올라와 있다. 아무래도 생긴 것이 티눈보다는 사마귀 같다. 아이 앞으로 처방된 약(베루말 액)을 꺼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사마귀는 바이러스 때문에 생겨요. 피부 표피 세포가 막 증식해서 이렇게 커지게 돼요. 그 증식을 억제해 주는 약을 발라 줄 거에요. 하루에 두세번 발라주고, 새로 바를 땐 전에 바른 약을 제거하고 발라야 해요. 약을 제거할 때는 그냥 떼어내면 아파요. 손톱 갈아내는 줄 같은 걸로 살살 밀어서 제거해주면 편하실 거에요. 약 바르고는 잘 말리고 움직여야 해요.


사마귀 치료에 쓰이는 전문의약품 '베루말 액'. 항암제로도 사용되는 성분인, 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5-Fluorouracil'이라는 성분으로 되어 있다.


왼손에는 비타민 사탕 두개를 쥐고 오른손은 엄마의 손을  쥐고 약국 문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 그리고 여전히 걱정스런 아이 엄마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릴   발을 그렇게 살피시던 우리 아빠의 모습이 생각났다.



———————



초등학교 5-6학년,  피부는 여러가지로 말썽이었다.


1) 늦둥이 동생을 낳은 엄마를 도와준답시고 맨손으로 설거지를 자주 해서였을까, 손에 습진 잔뜩 생겼다. 할머니는 갖고 계시던 반질(우레아 연고) 매일  손가락에 발라주셨다(우레아,  요소연고는 주부습진  굳은살의 치료에 쓰이는 각질용해제로서, 일반의약품이다). 할머니가 발라주시던, 분홍색  안의 반질 연고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보고 싶다 우리 할무이.


2) 까맣게 그을린 시골아이의 얼굴에는 희끗희끗 버짐이 생겼다. 사진을 찍으면 얼굴이 얼룩덜룩 송아지 같았다. 요즘도 그 시절 사진은 너무 못 생겨서 못 보겠다. 당시 기악부 키보드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항상 하얀 제복을 입고 구령대 앞에 섰었는데, 그 때의 사진들을 보면 하얀 유니폼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까만 피부가 정말..우와...심하게 못났다...우리 엄마 아빠는 날 어떻게 계속 키워준걸까? 나도 자식을 낳으면 버짐이 얼룩덜룩해도 이뻐 보이려나.

(참고: 버짐의 정식 용어는 백색비강진(pityriasis alba)으로, 일정 부위에 저색소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건조한 환경에서 자외선에 노출이 심한 경우 발생하기 쉽다. 심한 경우 스테로이드 연고를 일정 기간 사용하여 치료하며, 보습을 철저히 해 줌으로써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보통은 수개월 이후에 좋아진다.)


마른버짐(백색비강진, pityriasis alba)의 증상. 출처: https://www.verywellhealth.com/


3) 털레털레 걷던 걸음걸이에 문제가 있는건지, 발바닥과 발가락에는 티눈들이 자리잡았다. 할머니가 티눈액을 발가락에 발라 주시면, 며칠 후 아빠가 살살 그 부위를 뜯어 내셨고 그에 따라 티눈 뿌리가 뽑혀 나오면 새빠알간 피가 곧이어 방울방울 솟아나오곤 했다. 워낙 피를 무서워하지도 않았고, 그 쌀알같은 티눈 핵이 쏙 뽑혀 나오는 것이 시원해서, 나는 나름 그 시간을 즐기곤 했다. 휴지에 싸인 티눈핵을 바라보며 후련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티눈 중에서도 유난히 크고 아픈 놈이 있었다. 왼쪽 발등과 발바닥 경계쯤 되는 옆면에, 볼록하게 생긴 커다란 티눈이 있었다. 티눈 액을 발라봤자 겉의 굳은살만 살짝살짝 벗겨질 뿐, 커다란 덩어리는 아예 꿈쩍할 생각을 안 하기에 그냥 냅두지 뭐 하고 포기한 상태였다. 다만, 오래 걷거나 왼발에 체중을 싣게 되면 비틀거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러던 중, 1999년 여름.

교사였던 아빠는 여름방학이면 항상 두 딸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많은 곳을 여행시켜 주셨다. 그 해 여름에도 우리는 동해에 갔고, 나와 언니는 해수욕장에서 한참 물놀이를 하다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후식으로 거봉 포도를 주워 먹고 뻗어 있는 내 발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던 아빠는..뭔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발가락 하나에 남아 있던 티눈이 깔끔하게 쏙 빠진 것이다!

 

늘 호기심이 넘치시던 우리 아빠는 바닷물과 티눈의 제거 간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시고, 그날부터 실험에 돌입하시게 된다. 매일 밤 아빠는 분홍색 대야에 더운 물을 한 가득 받아 놓고, 소금을 왁 쏟아 부으신 다음 거기에 내 발을 30분 정도 불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매일 밤 배쓰솔트에 족욕하는 호사를 누린 것이다. 아빠의 정성에 따른 플라시보 효과인지, 실제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웬만한 티눈들은 그 이후로 쉽게 쉽게 제거가 되곤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우리의 왕건이는 꿈쩍도 안했다. 그러자 아빠는 확신에 넘쳐 말씀하셨다.


야아, 이놈은 티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결국 아빠를 따라   겨울방학, 대형병원 외과를 찾았다. 그리고 며칠 . 수술 끝에 마취가 약간 덜 풀린 채,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뭔가 녹색빛으로 가득한 방안. 차가운 기운. 감각이 없는 . 잠이    같은   앞에 병리과 선생님이 길쭉한 튜브를 흔들어 보였다.  안에는 붉은 피와 함께 하얀 덩어리가 엉겨 붙어 있었다.


영화 '아저씨' 중에서. 튜브 안에 있던 낭종 덩어리는 당시 열두살인 내 눈에 저렇게 크고 괴이하게 보였다.


표피낭종이라고 했다.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혹 같은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간호사 선생님들의 부축을 받아 수술장에서 대기실로 나왔는데, 우리 아빠는 내 안경을 들고 또 그새 어딜 가셨더랬다. (아마 담배타임 중이셨겠지.)  눈 앞이 안 보여서 절뚝거리며 아빠를 애타게 찾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언제나 가만히 못 있는 건 분명 아빠를 닮았다!!


수술은 선생님이 하셨지만, 뭔가 큰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과, 내 발에 살던 뭔가를 떠나 보낸 듯한 허전함으로 집에 돌아왔다. 아빠는 그 이후에도 종종 수술 후 관리를 위해 내게 소금 족욕을 시켜 주셨다. 아빠의 정성 덕분에 상처는 잘 아물었지만, 수술한 자리에는 낭종 대신 커다란 굳은 살이 남아 지금도 가끔은 체중이 실릴 때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도.


어릴 땐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아빠. 지금 생각해보면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청년이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딸바보 아빠였다. (아, 막내가 태어나고 나서는 아들바보 되셨다.) 그 때를 회상하다 보니, 아빠가 따뜻한 소금물 안에서 발을 어루만져 주시던 촉감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이번 주말에 부모님 보러 가면, 내가 더운 물 받아 놓고 아빠 발 한번 씻겨 드려야겠다.



 ..... 참, 그래서 정말 티눈 제거와 소금물 간에 상관 관계가 있느냐고요?




궁금해서 좀더 찾아봤는데, 일반적으로 집에서 쓰는 짭짤이 맛소금(sodium chloride) 말고, epsom salt라고 불리우는 황산마그네슘(magnesium sulfate) 성분 파우더가 실제로 티눈(corn)의 치료에 사용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닷물에 있는 황산마그네슘염이 실제로 티눈의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우리 아빠가  주신 소금물 족욕 이후 티눈이 많이 좋아졌던 것은, 아마도 소금 족욕의 효과라기보다 따뜻한 물로 족욕을   자체가 굳은살이나 각질의 용해에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아니면 아빠의 사랑 덕분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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