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다수의 사람들이랑 좀, 어딘가 분명히 다르다는 걸 꽤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남들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일상의 작은 자극 하나부터 웅장하게 가슴에 다가온다는 걸. 마찬가지 이유로 작은 불편과 부조리함 하나라도 용납하고 넘어가기가 껄끄럽고 분노스럽다는 걸. 사람들이 나무를 하나씩 보며 도란도란 즐겁게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숲을 보며 대지의 개발 계획을 혼자 외롭게 세우고 있다는 걸. 아무리 일상적인 무언가라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야만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많은 다른 사람들이 따르는 성공한 일과 삶과 사랑의 형태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이상적인 가치를 다 가진 삶을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머쥘 수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다행히도 예술적 재능도 여럿 있고 공부도 잘했으며 다른 이를 진심으로 도우려는 모습을 보였던 저는, 어떠한 집단이든 초반에 진입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다가가 호감을 얻기도 사람에게 먼저 호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집단을 들어가도, 혼자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흥행한 <너의 이름은>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른 것으로 유명한 일본의 밴드 RADWIMPS의 또 다른 곡으로 "막대 인간(Stick Figure)"이 있습니다. 노래 속 주인공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은 사람과 세상의 상식과 법칙대로 자신을 대해 주고, 여기에 회답하기 위해 미소와 동정과 겸손과 자기희생 등 보통 사람의 미덕을 갖추며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족히 1억 가지는 넘을 듯한 필요 사항이라는 말에 피식 웃으며 어찌나 절절히 공감을 했던지요.
しかしまったくもってその甲斐もなく結局モノマネはモノマネでしかなく그러나 전적으로 그리한 보람도 없이 결국 흉내는 흉내일 뿐이라서
一人、また一人と去ってゆき 人間が剥がれ落ちるのです
한 명, 다시 한 명 저를 떠나가고 인간의 껍질이 부슬부슬 떨어지는 것입니다
大切な人を幸せにしたり 面白くもないことで笑ってみたり
소중한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거나 재미도 없는 것을 보고 웃어 보이거나
そのうち今どんな顔の自分か わからなくなる始末です
그러는 사이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게 됐다는 전말입니다
초등학교 때는 남들과 비슷해지려는, 또래 집단에서 혼자 달라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래들이 보는 순정 만화를 보고 아바타 게임을 하고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대화에 끼려고 했습니다. 서브컬처에 "취향저격"을 당했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입시 공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이 노래에서도 나오듯 흉내는 흉내일 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집단, 일반적인 모델에 편입되려는 저의 노력에 부자연스러움과 환멸감을 느끼며, 셀 수도 없이 많은 무리에서 저는 뛰쳐나와야 했습니다.
문제는, 남과 다른 성미와 취향에 쉽게 주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는 데 관심도 없으면서, 저는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타인들의 인정 위에 세우고자 했다는 겁니다. 나이 삼십이 되어도 프릴 가득한 공주풍 드레스에 끌리고 사진기 앞에 서는 게 마냥 좋은 저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매력이고, 더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사람이라는 인상이겠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실망 그리고 편견의 대상이었습니다. 나의 모습 그래도 행복하려는 사람은 후자의 이 편견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편견이 트라우마로 번진 경우라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간의 소문과 시선에 신경 않고 내 본질을 추구한다 해도, 언제 사람과 사회의 편견이 나의 앞길을 막을지 모릅니다. 행복은 늘 불안한 토대 위에 있습니다. 스스로가 택한 삶의 방식에 자신감과 안정감이 없다면 스트레스 그리고 인정받기 위한 조바심으로 불행의 트리거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돈이나 명예, 소중한 사람, 건강을 잃는 등 부정적 편향을 강화할 제 무덤을 파기가 쉽습니다.
한 번 편견이 생긴 사람의 인식은 정말이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사회뿐 아니라 정말 나를 아끼고 사랑해 준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까운 건 가까운 사람이 되었던 불특정 다수가 되었던 사회의 시스템이 되었던, 보통에 편입되지 못한 사람에게는 언제이고 낙인이 개입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원하는 직업을 가지기 어렵게 되고, 원하는 취미와 삶을 병행해 살기가 어렵게 되는 거죠. 세상에는 너무 많은 편견과 낙인이 있어 쉬이 알 수 없을 뿐, "남 눈치" 보느라 너무도 많은 제약을 우리는 안고 살아가지는 않는가요.
제가 사랑하고 좋아해서 열정을 바쳤던 일은 대부분이, 타인과 사회의 편견 때문에 삶에서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열정을 보존하며 우직히 내 갈 길을 가려해도 사람들의 비난과 호소가 저를 멈췄습니다. 같은 학교 친구들부터 인터넷 상 수많은 팔로어들, 더 자주는 가족까지 편견의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저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은 가족 중 한 명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선언에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고, 호흡이 잠깐 멈춰버리기까지 하며 발작을 하던 모습을 눈 앞에서 본 것입니다. 나는 내가 행복하게 살고 싶은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건데, 다른 가족들은 말했습니다. 어서, 빨리 네가 잘못했다고 해.
내가 나의 모습 그대로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다른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반복될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을 굳게 수호하고 나가려는 의지는 사치이자 이기심이 됩니다. 그렇게 저는 검소하고 이타적인 인간으로 개조되어 왔습니다. 어딘가 남들과 다른 나의 모습을 억누르고 꺼내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모두가 잘 지낼 수 있으니까. 나 자신이 아플 일도 누군가와 부딪힐 일도 누군가를 증오할 일도 없으니까. 나의 본질을 내려놓겠다는 큰 희생과 부정은, 남들 눈에 보기에는 검증된 행복을 좇아가는 이제야 철든 제대로 된 어른의 모습이라는 것.
이러한 생각이 거듭되며, 우울은 그렇게 제 마음에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