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별 Mar 16. 2024

이번 생은 망했다고요?

사랑으로 충만했던 신혼생활이 갑자기 깨졌던 그날 이후, 더 이상 내 옆엔 그가 없다는 사실이 뼈가 시리도록 아팠다. 나는 이제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내 이름을 부르며 현관문을 벌컥 열며 뛰어들어오던, 힘들고 더러운 건 무조건 자기가 하겠다며 화장실 청소 담당을 자처하고, 분리수거를 버려주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긴 이별을 맞은 나는, 차가운 겨울비를 우산 없이 맞는 어린아이처럼 대책 없이 황량하기만 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슴속에 생긴 구멍 속에선 '쉐-쉐'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는,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이 말이 얼결에 툭 튀어나와 버렸다. 엄마랑 아파트 단지를 걷던 어느 날이었고,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번 생은 망했어"


나는 한순간에 아무 준비도 없이 혼자가 되었고,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아주 간신히 살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한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나란 애는 정말, 나 밖에 모르나 보다.


나와 함께 걷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아직 망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살아가는 게 온통 고통뿐인데, 숨쉬기조차 이렇게 힘든데, 내가 앞으로 어떻게 멋진 삶을 살 수가 있겠어. 내가 어떻게 다시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 앞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냐며, 내 인생은 이대로 망한 게 맞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행복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나 있을 법한 현실감 없는 이야기였다.


이. 생. 망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야기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지, 단지 하나의 유행어처럼 내뱉는 건지, 정말로 그들도 인생의 나락을 경험해서 하는 표현들인지 궁금하다.


지금의 나는, 내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없이 평탄한 인생은 아닐지라도, 비록  내가 원한 삶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여기가 끝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다만, 감당하기 힘든 경험을 했음에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거나 부정만 하지 않은, 바란 적 없는 인생의 모습조차 수용하고, 스스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 인생의 경험을 통해 나는 스스로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건강한 몸과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컨트롤하는 방법들을 깨달아가고 있다.


또한,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헤쳐나갈 때, 일희일비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나만 볼 수 있는 지도'를 갖게 된 것도 같다.


'인생의 봄'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는 짧았지만, 계절은 매년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이니, 언젠가 해를 거듭해서 또다시 나에게 봄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는 무심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아직 걸어갈 길이 너무 길고, 멀다. 그래서 쉬이 그려지지도 않고, 섣불리 설렐 수도 없다. 설렘보다는 불안함과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분명한 건, 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망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가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인생이 개망, 폭망, 쫄망했다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우리 그냥 속는 셈 치고 함께 걸어가 보자고 말하고 싶다.


이번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