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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과 복숭아

by pahadi


화가 났다. 내 입장은 하나도 생각해 주지 않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기보다 서운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카톡창에 모진 말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이런 점이 서운하다고. 너는 이래서 안 된다고. 구구절절한 하소연에 적절한 인신공격을 섞어 장문의 글을 완성했다. 보낼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쉽게 뱉은 누군가의 한마디에 (혹은 어렵게 뱉었더라도) 깊게 상처받았던 지난날들을 떠올린다.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야 했을까? 단순한 분풀이는 아니었을까? 아무 일 없던 듯 시간은 흘렀지만 잊히지 않는 그 말들의 힘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에라이. 나 혼자 기분 나쁘면 됐지. 네 기분까지 망칠 필요 뭐 있냐.'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베개를 끌어안는다. 낮잠이나 자야겠다


푹 자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낫다. 카톡창을 열어 미처 보내지 못한 메시지를 서둘러 지운다. '이 정도로 말할 일은 아니었잖아.' 이불을 털고 일어나 냉장고로 향한다. 냉장고에서 내가 좋아하는 딱딱한 복숭아를 꺼낸다. 여름도 끝물에 접어들고 딱딱한 복숭아는 이미 철이 끝났다. 냉장고 속 딱딱한 복숭아를 다 먹으면 내년 여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더 귀하고 맛있는 복숭아.


쏴아아- 찬물에 복숭아를 박박 씻는다. 복숭아는 꼭 껍질째 먹어야 제 맛이 난다. 간이 맞다고 해야 하나? 식초를 조금 부어 다시 한번 깨끗하게 씻는다. 소파에 앉아 한입 크게 베어 물자 시원하고 달콤하고 향긋한 복숭아 즙이 코와 입안 가득히 퍼진다. 그래. 이 맛이지! 온 신경이 복숭아에 쏠리고 지난 일은 과거가 된 지 오래다.


낮잠과 복숭아 하나면 해결될 일을 영영 해결하지 못할 일로 만들 뻔했다. 그냥 낮잠 자고 복숭아 먹은 얘로 충분한데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못하는 얘가 될 뻔했다. 순간으로 지나갈 감정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에 영원으로 남을 상처를 줄 뻔했다. 역시 말이란 아낄수록 좋다.


아아- 오늘도 이렇게 아슬아슬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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