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드문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다. 후덥지근하고사람이 처지게 하는 날씨가 계속되는 주말, 기말고사가 끝난 큰 아들과 덩달아 들뜬 작은 아들보다 엄마가 더 신이 나서 부엌을 들락거린다. 평소 요리를 싫어하고 주방에 서 있는 것조차 기피하는 내가 말이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남편과 만나 한 가득 장을 봤다. 등갈비와 술부터 챙기고 과일과 간식류, 채소류를 고루 카드 가득 담았다. 토요일 아침, 주말이면 무조건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침대 위를 벗어나지 않는 내가 오전에 일어나 부엌을 정리하고 냉장고를 치우고 그릇을 닦았다. 음식물 쓰레기도 미리미리 버리고 빨래도 건조까지 끝낸 뒤 치워버렸다. 그동안 남편과 아들은 온 집안을 쓸고 닦았다. 쉬지않고 10인분 전기압력밥솥에 꽉 차게 쌀을 씻고 무를 깍뚝 썰고 소고기 듬뿍 넣어 국을 끓였다. 유일하게 실패하지 않는 (시판 양념을 쓰니까) 등갈비를 손질해서 불에 올리고 밑반찬을 꺼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 이번에는 배달앱을 켰다. 간만에 다양한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할 남동생 식구를 위해 도착 시간을 계산해 감자탕과 해물아구찜을 차례로 시켰다. 종종거리며 바삐 움직이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고 내내 설렜다. 오늘은 내 피붙이들이 우리집에 오는 날이다.
"고모! 우리 왔어요!"
오후 4시가 되고 남동생이 부모님을 모시고 먼저 도착했다. 부쩍 자란 조카를 안아주고 뽀뽀하는 동안 팔순 친정 엄마는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부터 식탁 위에 올려놨다.
"세상에 이게 왠일이야. 그냥 몸만 오라니까 자꾸 이러네. 이러고서 힘들다고 몸살하려고!"
괜찮다고 하는데도 팔순 할매가 김치도 두 종류나 새로 담그고, 꼬들꼬들한 오이지도 무쳐오고, 밥도둑 양념 게장도 한 통가득, 수육도 락앤락 통에 꽉차게 만들어 챙겨오셨다.
"이 식구가 먹을라믄 이것도 모지라. 암소리 말고 얼른 받아. 잘 먹을거면서 그러냐."
엄마의 타박아닌 타박을 들어가며 하나하나 그릇에 옮겨담는데 올케가 자꾸 내 옆으로 온다.
"이야, 어쩌냐, 너 다리가 똑부러졌나보다. 앉아서 꼼짝도 못하나봐. 병수발 드느라 우리 올케 힘들겠어. 큰일이야 큰일."
올케를 부엌에서 내몰고 놀고 있는 남동생을 쳐다보니 남동생이 웃으며 일어서 그릇을 나른다. 그 사이, 여동생네도 도착했다. 미리 손질해서 숙성시켜 잘라 먹기만 하면 되게 연어를 준비하고 수박도 내 몸통만한 걸로 사들고 왔다.
12명이 앉을 자리를 만들고 음식을 내어놓고 보니 먹기도 전에 마음이 푸근했다. 날이 습해 에어컨을 켠 탓에 음식이 식어 아쉬웠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여가 첫 대목처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다같이 먹고 마시는데 제일 어린 3학년 조카와 고등2학년 큰아들, 사촌들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올케와 시누간에 더 먹으라고 권하는 모습은 정겨웠으며 매형과 처남이 궁금한 이야기를 물어보며 나누는 대화는 감사했다.
다섯살 아래 남동생은 머나먼 남미에 터를 잡았다. 3년 전 공항 출국장에서 남동생 가족을 보내며 다음에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나 보겠구나 싶어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할 상황과 변수들로 올 여름 갑자기 두 달 일정으로 온 가족이 한국에 들어왔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형제들 모두 모여 다함께 웃으며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내 돈이 들어가도 아깝지 않고, 내 수고가 들어가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모두 만족하며 식사를 마쳤지만, 숟가락은 잠시 내려놓을 뿐, 입이 쉴 수는 없다. 재빨리 상을 치우고 그릇들을 싹 설거지 하며 2차를 준비했다. 내가 정리하는 동안 여동생은 연어를 썰고 케잌을 꺼냈다. 그 틈에 남동생은 가져온 게이샤 원두를 내려 누님들에게 향기를 선사했다. 그런 삼촌을 보며 바리스타라고 말하고 싶었으니 입에서는 타바스코라고 발음한 바보 아들한테 카드를 쥐어주고 심부름을 보냈다. 초등, 중등, 고등 독수리 오형제 같은 다섯이 나가서 치킨을 사오라고 시켰더니 무인아이스크림점을 통채로 털었나보다. 치킨 세 마리 값만큼 아이스크림 값이 나왔다. 치킨 세 마리가 튀겨지는 동안 놀이터에서 놀다가 오느라 아이들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로 돌아왔다. 엄마 카드 마음껏 쓴 아들이 얄미웠지만 어른들 드시라고 돼지바를 명수대로 야무지게 챙겨왔길래 봐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2차는 연어와 치킨과 와인과 케이크와 수박이 곁들여진 국적도 정체도 불분명한 페어링 한 상. 남편이 푸짐하게 썰어내온 수박을 보시며 아버지가 "활짝 핀 꽃같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썰은 수박을 보고 꽃을 떠올리는 할아버지의 낭만과 감성 덕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6학년 조카는 한 손에 양념치킨, 한 손에 수박을 들고 번갈아가며 듣어먹었고, 와인과 이강주와 맥주와 소주는 차례로 사라져 갔으며, 연어는 게 눈 감추는 것보다 빠르게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쏟아지는 이야기들 덕에 배보다 마음이 더 불렀다.
어릴 때 명절날 외갓댁에 가면 의아하게 생각하던 장면이 있다. 큰외삼촌댁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아빠와 어린 우리들을 거실에 두고 이모들과 한 방에 들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더랬다. 자주 못 만나던 이모들, 외삼촌들과 함께 밀린 수다를 떨고 사는 얘기를 하며 먹고 마시는 동안 나는 바깥에서 낯선 사촌들과 어색하게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버텨냈다. 방문을 빼꼼 열어보면 엄마는 얼른 나가라고 손짓하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땐 엄마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엄마는 나와보지도 않고 방안에서 비밀회합하듯이 때로 소곤거리고 때로 고성을 흘리며 모여있는걸까? 무슨 얘기들을 하는걸까? 하고 말이다. 지금은 이해한다. 자식이나 부모와는 다른 동기간에 주고받는 정, 형제자매와만 나누는 깊은 감정이 있다.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서로 살을 맞대고 지지고 볶으며 자라온 그 세월의 깊이 만큼 애잔한 마음 말이다.
9시 반이 다된 시간, 드디어 헤어질 준비를 시작했다. 음식을 싸주고, 책과 옷가지도 담아 아이들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오십 넘은 K 장녀는 습한 주차장에서 이 사람 끌어안고 저 사람 끌어안으며 '사랑해'를 남발하고 연신 손을 흔들었다. 헤어지는게 아쉽고 돌아서자마자 또 보고 싶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잘 도착했냐고 톡을 하는데도 자꾸 애틋했다.
주말에 친척들 모인다고 하니까 큰아들이 '정모야?'라고 말했었다. 정모라니, 요즘엔 잘 쓰지도 않는 말인데 어디서 이 말을 들었을까? 어쨌거나 가족모임을 정모라고 부르니 느낌이 색달라서 웃음이 나왔었다. 상을 치우면서 문득 정모라던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모는 정기모임이 아니라 정을 모으는 자리야. 사랑이 모이는 자리. 이 마음으로 그 오랜 세월, 엄마들은 음식을 장만하고 자식을 부르셨겠지. 조용히 나 혼자 다음 정모를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