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단풍이
하얗게 질렸다
- 눈 -
가을은 늘 화려하게 물들지만, 그 속에는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단풍의 붉은빛은 마지막까지 빛나며 계절의 끝자락을 채운다. 하지만 오늘, 갑작스러운 눈이 그 모든 찬란함 위로 내려앉았다. 새빨간 단풍이 하얗게 질린 풍경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슬픔보다 설렘을 느꼈다.
눈은 모든 걸 덮는다. 떠나는 가을의 흔적도, 화사했던 단풍의 잔상도. 하지만 그 하얀 풍경 속에서 나는 추억을 곱씹기보다, 새로 찾아온 계절의 첫 페이지를 펼쳐보고 싶었다. 눈 위를 걸을 때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대신 발밑에서 생소한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난다. 그 낯선 감촉이 마냥 즐겁고, 두근거리게 한다.
순백으로 뒤덮인 세상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면서도 동시에 가을의 마지막 인사를 품고 있다. 나는 눈 속에서 사라져가는 단풍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하얀 세상이 내게 건네는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한다. 어쩌면 가을의 따스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겨울의 고요 속에서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겨울은 차갑고 고독한 계절이라지만, 눈은 그 차가움 속에 따뜻함을 품고 있다. 하얀 눈은 세상을 단순하고 순수하게 만든다. 가을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그 단순함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가을을 보내며 아쉬워하기보다는, 이 순백의 눈 위에 내 첫발을 내딛는다.
눈이 가을을 덮었듯, 언젠가 겨울도 또 다른 꽃으로 덮일 것이다. 이 계절은 그렇게 흘러가겠지만, 지금 눈 속에서 느끼는 설렘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하얀 세상 속을 걸으며, 나는 떠나는 가을을 기억하는 대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며 웃는다.
겨울의 첫눈은 그렇게, 또 다른 시작을 꿈꾸게 한다.
새빨간 단풍이 하얗게 질린 이유
그래! 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