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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놀룰루 Oct 16. 2023

나의 여행, 삶 그 모순에 대하여

좋은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에 놓아주세요. 

두 손 두 발이 자유로운 배낭여행을 좋아한다. 

쾌적한 배낭여행을 위해 모든 짐의 총합을 9kg 이내로 맞추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이는 수화물을 붙이지 않아도 되는 무게이며 내가 배낭을 거추장스럽게 느끼지 않을 정도의 무게 이기 때문이다. 

말이 9kg이지 몇 달간의 여행을 위해 챙겨야 할 것들을 이것저것 넣다 보면 훌쩍 무게가 넘고 만다. 따라서 배낭 안에 채워질 수 있는 것들은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어야만 한다. 풀었다 싸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끊임없이 빼내고 넣는다. 최종적으로 채워진 배낭을 어깨에 메고 방에 남은 물건들을 돌아보면 여전히 내 방엔 물건들로 가득하다. 그때마다 이렇게 많은 짐이 사실 나에게 다 필요했던 물건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하다 보면 더더욱 나에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단 사실과, 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오히려 나를 가볍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선택의 고민에서 자유로워지고 정리를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게에서도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하다 보니 나의 욕심은 온전히 나의 어깨로 전해졌다.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나는 그 무게에 고통받게 되는 것이었다. 


나름 미니멀리스트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에 있는 짐들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첫 모순은 여기서 시작된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일을 시작하면 왜 이렇게 아침만 되면 입을 게 없는 건지, 그 많던 옷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모르겠다.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조차 잊은 채 하나 둘 사모으는데 급급하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고, 안 그래도 좁은 집이 짐으로 넘쳐난다. 



베트남 사파의 카페에서

내 여행과 삶이 가진 모순은 이것뿐이 아니다.  


고백하지만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모르는 낯선 환경에 가는 것도, 낯선 장소에 놓이는 것도 싫어한다. 
'역시 집이 최고야'를 주장하는 집순이 이기도 하고, 낯선 것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 중 하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물러 있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호기심도 많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나의 긴 여행 법은 
한 도시, 한 마을에 짧아도 일주일 이상을 머물고 한 나라엔 적어도 한 달 이상을 머문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나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서 모든 것을 경계하다가 매일 가는 길, 매일 보는 사람들, 매일 하는 행동이 생기면 모든 게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만의 패턴이 생기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는 모험심이 생긴다. 
그 덕분일까 그 긴 여행의 나는 조금은 밝고 유쾌하며, 모험심 가득한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 

물론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한 달 내내 집 밖을 안 나가도 행복해하고, 집과 회사의 굴레를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궤도를 유지한다. 어쩌다 생긴 약속을 마치고 집에 귀가하면 에너지가 축 쳐져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나는 여행과 일상에서 서로 모순적인 모습을 가진다. 어느 게 진짜 나의 모습이고 일상인지 처음엔 혼란스럽기만 했다. 심지어 여행 에서의 나를 가짜로 여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행에서의 나도, 일상에서의 나도 모두 나의 모습이란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누구나 다양한 페르소나를 가지고 살아간다. 만나는 사람, 장소, 환경에 따라 이색 저색 다채로운 빛깔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말이다. 


좋든 싫든 이 모든 모습이 전부 '나' 라면 가능한 마음에 드는 나의 모습을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환경에 계속 나를 놓아두기로 한 것이다. 

조금은 가볍고 유쾌하게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니는 용감한 나의 모습이 좋아, 나는 계속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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