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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리 Jul 18. 2021

수술실 가는 길

마취하면 안 아파야 정상 아닌가요

18.




수술 전날은 잘 잤다. 자정부터 물도 못 마시는 금식이라 12시가 되기 전 물을 많이 마셔놓고 미리 챙겨간 가습기도 틀었다. 임신 중엔 자주 입안이 바싹 말라 몇번이나 자다 일어나 물을 마셨기 때문에, 물을 못 마시는 게 가장 큰 괴로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오산이었다.


중간중간 또 혈압체크하고 하느라 잠을 깨긴 했지만 금방 다시 잠들었다. 임신 기간 내내 잠을 못 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원래 잠을 잘 자는 편이지만 임신 때는 더욱 잠이 쏟아지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당기는 쌍둥이 임신부라 하루의 많은 시간을 누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잠도 늘었다. 남편은 나를 보고 ‘신생아만큼 잔다’고 했었는데... 낳고 보니 과언이 아니었다 싶다.


아무튼 수술날 아침은 밝고, 경건한 마음으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무 것도 못 먹었지만) 양치질을 했다. 간호사가 와서 소변줄을 끼웠다. 일반 여성병원에서는 마취하고 소변줄을 끼워주는 친절함을 베풀기도 한다는데, 상급 종합병원은 그런 거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소변줄 끼우는 게 제일 아프다고 했는데 그럭저럭 할 만했다. C병원을 다니며 배운 것은 아래로 뭐가 들어올 때 숨을 크게 내쉬면 힘을 빼기가 쉽다는 것이었는데, C병원을 졸업하고도 잘 써먹었다. 소변줄 끼울 때도 크게 숨을 내쉬었다. 끼워질 때가 약간 불편하고 그후로는 의외로 별 이물감도 없이 괜찮았다.


복도에 나가 이동식 침대로 옮겨누워 좀 기다렸다. 입원실은 5층, 수술실은 4층이었다. 남편은 수술실 앞까지만 따라올 수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수술실 앞 의자를 다 치워버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두 손 모으고 수술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면 의사가 나와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합니다’하고 전달하는 장면은 맞이할 수 없었다. 남편은 수술실 앞에서 나와 헤어지고 병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남편과 헤어질 때 눈물이 난다던데 나는 눈물은 안 났고 그냥 기대만 됐다. 철이 없었다.


수술실, 정확히는 수술장 안에는 먼저 광장(?)같은 회복실이 펼쳐져 있었다. 이동식 병상이 잔뜩 늘어서 있고 간호사나 레지던트(추정)가 와서 계속 뭘 체크하고 그랬다. 누가 와서 체크할 때마다 금식은 했는지, 이는 흔들리거나 빠진 것이 없는지를 계속 물었다. 나중에는 어디다 써서 걸어놓고 싶을 정도였다. 내 옆에는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하러 온 젊은 남성이 있었는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것에 귀찮아하지도 않고 대답을 잘 하고 있었다.


30분 정도는 누워서 기다린 것 같았다. 곧 다시 병상이 움직이고 드디어 진짜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실 안은 들었던대로 과연 추웠다. 그리고 사람이 참 많았다. 최소 여섯 명은 있었던 것 같다. 수술대로 옮겨누우며 옷이 홀랑 벗겨졌는데 젊은 남자 레지던트도 있고 그랬지만 별로 창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환자고, 너는 의사야. 경건한 수술실 안에서는 성별도 뭐도 없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존엄성이나 수치심 이런 것들이 죄다 쓸모가 없어진다.


척추마취를 하기 위해 모로 누워 등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하반신만 마취하고 정신은 말짱한 상태로 수술을 받는 것이다. 무서워서 전신마취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신마취는 아무래도 회복도 더 오래 걸리고, 제왕절개 수술을 하는데 전신마취까지는 필요 없어 대부분 하반신 마취만 한다. 나도 처음엔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배를 갈리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무서웠으나, 약 팔 개월여 간의 임신 기간을 거치는 동안 어쩐지 두려움이 희석되어 척추마취를 하게 됐다. 배가 잔뜩 부른채로 일상적인 거동도 힘든 나날을 겪고 나면은 ‘그 까짓 거’하는 마음상태가 되는 것이다.


배가 많이 나온 상태에서 등을 구부리는 것은 힘들지만 이때 제대로 구부리지 않으면 척추마취가 잘 안 돼서 여러번 주사를 찌르게 된다며, 척추마취 주사가 또 그렇게 아프다고 들었던터라 지레 겁이 났다. 때문에 등을 최대한 잔뜩 구부렸다. 이걸 하는데 두 명이 붙어서 도와줬다. 마취의가 등을 둥근 원 모양으로 아주 여러 번 소독하고 주사바늘을 찔렀다. 생각보다 안 아팠다. 이때만 해도 신이 났다. 아하, 나는 남들 아프다는 척추마취 주사도 별로 안 아프구나.


바로 눕혀지고는 상체에 엄청난 수의 시트가 덮였다.


많이 추우시죠?


추울까봐 뭘 잔뜩 덮어줬는데, 그래서 덕분에 상체는 전혀 춥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가 달달달 떨렸다. 안 추운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양손이 수술대에 고정되고, 가슴 아래로는 볼 수 없도록 흰 시트가 드리워졌다.


근데 이 시트가 참 무서웠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선 초록색 천으로 가려서 수술받는 환자가 아래를 못 보게 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냥 침대 싸는 흰 시트 같은 걸 수술대 양옆에 수액걸이 두 개 갖다놓고 거기다 걸었다. 그게 왠지 쉽게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괜찮은가 의심과 불안의 기분이 스멀스멀 마음 속에 피어올랐다. 레지던트와 인턴인 듯한 사람들이 수술 준비가 끝났다며 주치의에게 연락을 하고, 또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여전히 이가 딱딱 맞부딪혔다. 이가 너무 떨려서 내 머리 위에서 수술 집도를 참관하고 있는 인턴(추정)에게 물었다.


저, 이렇게 이가 떨리는데 정상인가요?

추워서 그러신가봐요. 좀 더 덮어드릴게요.


아 별로 춥진 않은데...하는 말은 삼켰다. 어쩌면 추위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체가 추울 수도 있으니까.


‘이젠 아무래도 좋으니 빨리 좀 시작하지’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주치의가 수술을 집도하러 들어왔다.


수술대 아랫부분이 기울어지고, 다리가 뜨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취가 된 것 같은데, 그래도 마취가 제대로 됐는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불안했는데 다행히 제대로 되었는지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산모는 배를 가르는 느낌이 들었다는데 전혀 뭘 가르는 감각은 없었다.


대신 계속 끊임없이 뱃속 장기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 너무너무너무 아팠다. 아니 마취를 하면  아파야 되는  아닌가요? 별로  아플 거라 기대하고 있던 중이어서 아픔은 배가됐다. 이와중에 이는 멈출줄을 모르고 달달달 떨렸다. 이러다 이가  빠지는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안쪽 벽을 씹으면서 떨리는 이를 진정시키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놈의 수술은 언제 끝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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