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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DE Aug 26. 2020

ETF의 세상 7
-최초의 ETF를 만든 네이트 모스트

창시자


1975년 잭 보글은 Vanguard를 설립하고 다음 해에 최초의 인덱스 펀드(Index Fund)를 선보였다.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다른 업계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자산운용(Asset Management)이라는 한 길만을 고수했다. 물론 그 이후로도 보글은 2019년 1월 타계하기 전까지 금융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글은 전통적인 금융인이었다.


하지만 여기 조금 다른 선구자가 있다. 보글이 창조한 S&P 500 인덱스 펀드 개념을 기반으로 미국증권거래소(AMEX: American Stock Exchange)에 상장시켜 마치 주식처럼 거래할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의 이름은 네이트 모스트(Nathan Nate Most), 최초의 ETF인 SPDR S&P 500 ETF(SPY)의 창시자다.


뱅가드라는 유산을 남긴 보글과 달리 모스트는 업적에 비해 크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번 장에서는 ETF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내고 상품화시킨 그의 인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출처: Institutional Investor


모스트의 경력은 매우 이색적이다. ETF의 창시자이니 보글처럼 평생을 금융 업계에 종사했을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첫 커리어는 바로 음향 엔지니어였다.


모스트는 UCLA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후 2차 대전 당시 미 해군 잠수함에서 음향 관련 엔지니어이자 물리학자로 활동했다. 이후 아시아 지역을 돌며 음향 장비 사업을 했고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Pacific Vegetable Oil 회사의 홍화씨(Safflower Seed) 트레이더로 일하며 원자재를 처음 접하게 됐다.


이때부터 Most의 커리어는 원자재 관련으로 굳어지는데 코코넛 오일 선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Pacific Commodities Exchange의 사장을 걸치고 1974년 처음 신설됐던 미국 상품거래위원회(Commodity Futures Trading Commission) 의장의 기술 자문(Technical Assistant)으로도 활동했다. Most 경력의 중심에는 원자재가 있으며 Most 스스로도 자신을 Commodities Man이라 불렀다. 그리고 Commodities Man으로서 경력은 Most가 향후 ETF를 발명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된다.


모스트는 원자재 관련 경력을 쌓으며 원자재 거래 과정에서 실제 실물이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가령 코코넛 오일을 예로 들면 거래하는 전 과정에서 코코넛 오일 실물은 창고(Warehouse)에 보관된다. 코코넛 오일을 사는 거래는 실질적인 오일을 창고에서 꺼내 오는 것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된 코코넛 오일의 소유권(receipt)을 획득하는 것이다.


반대로 코코넛 오일을 판다는 것은 창고에서 오일을 꺼내 파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보유한 소유권을 상대에게 파는 행위다. 즉 원자재 거래에서 원자재는 움직이지 않고 창고에 보관된 소유권만 거래된다. 물론 소유권을 지급하고 창고에서 원자재를 꺼낼 갈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소유권이 원자재의 실물 움직임을 대신하는 점이 포인트다.


원자재 사업 = 창고 + 실물 + 소유권


이는 마치 과거 유럽의 금은방들의 비즈니스 모델과 유사한다. 비싼 금을 매번 들고 다니기는 귀찮고 위험하니 이를 금은방에 맡기고 보관증을 받는다. 그리고 실제 경제 활동에선 금 대신 보관증이 화폐의 역할을 하게 됐다.


실물의 움직임 없이 실물의 소유권 혹은 소유권의 일부만을 사고파는 거래 방식은 Most가 1976년 미국증권거래소(AMEX)로 이직한 후 발명한 ETF의 탄생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AMEX의 상품 개발 총괄


미국증권거래소(AMEX)는 뉴욕증권거래소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증권 거래소다. 주식과 상품이 거래되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하다. 하지만 뉴욕증권거래소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증권시장인 데 상징성이 있다면 AMEX는 옵션과 같은 파생상품 거래의 중심지다. 1976년 62세의 나이에 모스트는 AMEX의 파생상품 개발 총괄로 들어간다. 모스트에게는 원자재맨에서 금융인으로 커리어 전환이었다.


외국 거래소들은 한국 거래소(KRX)와 달리 대체로 민간사업이다. 정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적자가 지속되면 망한다. 거래소는 트레이딩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로 돈을 번다. 결국 거래소 사업이 흥하기 위해선 거래량이 많아야 하고 거래량이 많기 위해선 상장된 주식이나 트레이드되는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야 한다. 만약 상장 기업의 수와 거래 가능한 상품이 줄어들면 거래량도 감소해 거래소의 매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런 거래소들은 자연스레 셧다운 되거나 더 큰 거래소에 인수된다.


AMEX의 파생상품 총괄 담당으로 간 모스트는 부진한 AMEX의 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상품 거래량을 늘리려 했다. 이는 다시 말하면 AMEX에 상장된 상품 리스트를 다각화해야 함을 뜻한다. 당시 AMEX의 거래량은 파생상품보다는 주식에서 주로 발생했으며 하루에 거래되는 거래량은 미미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모스트가 관심을 가진 분야가 바로 펀드였다.


당시 펀드 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며 전체 금융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갔다. 반면 뮤추얼 펀드 구조는 1920년 최초 탄생 이후 변한 게 없었다. 즉 투자자들은 펀드를 가입하고 펀드에서 주식 및 채권 같은 자산을 사는 구조인 것이다.


보글이 지수를 보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를 단순 추종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듯, 모스트 또한 비슷한 레벨의 천재적인 발생을 했다. 바로 펀드를 마치 주식처럼 자유자재로 거래할 수 있게 거래소에 상장시키면 어떨까?라는 발상이었다. 당시 펀드 산업은 성장 산업이었기에 펀드의 개수와 사이즈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동시에 사람들은 기존 자유롭게 거래가 불가능했던 펀드를 매일 거래하고 싶어 하는 니즈가 있었다. 그러니 이 펀드를 상장시켜 주식처럼 거래시킬 수 있다면, 이는 거래소의 거래량 증가로 귀결돼 궁극적으로 AMEX 이윤 증대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 보면 그리 참신한 생각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펀드를 주식처럼 트레이딩 하게 만드는 생각 자체가 굉장히 이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천재적이었다. 펀드를 상장시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스트가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워자재 맨으로 활동했던 경력이 크게 작용했다. 간단히 표현하면 모스트는 마치 펀드를 원자재 거래의 창고 그리고 주식과 같은 펀드 내의 개별 자산을 창고 안의 원자재 실물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ETF에 대한 구상이 어느 정도 완료된 시점에 Most는 최초의 ETF가 되어 줄 펀드로 뱅가드의 S&P 500 Index Fund를 선택했다. 즉 모스트는 뱅가드의 펀드가 ETF라는 상품의 첫 번째 창고가 되어주길 바랐다. 


1992년 모스트는 보글을 만나기 위해 뱅가드가 위치한 펜실베이니아 주의 밸리 포지(Valley Forge)를 방문한다.




SPDR S&P 500 ETF: 최초의 ETF


모스트는 보글을 만나 ETF란 청사진을 제시했다. 즉 뱅가드의 S&P500 인덱스 펀드가 창고가 되고 이 창고에 대한 지분을 발행 및 상장시켜 거래소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게끔 하는 구조다. 즉 S&P 500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 펀드의 특성을 온전히 보존함과 동시에 자유롭게 거래를 가능케 하는 것이 모스트가 제안한 ETF의 핵심이다.


보글은 모스트의 제안이 천재적인 발상이었음을 인지했다. 단 보글은 제안을 거절했다. 첫 번째로 모스트가 제안한 ETF의 궁극적인 목적이 거래량을 증대시켜 AMEX 거래소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금융 상품은 거래 때마다 거래 비용이 나가는데 이는 곳 투자자의 손실이며 동시에 브로커리지 회사들의 이익이다. 즉 저비용, 낮은 회전율 및 전체 시장 추종이란 특성을 지닌 인덱스 펀드를 만들어 일반 리테일 투자자들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일생의 목적이었던 보글에게는 이는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결국 거래량의 증가는 브로커리지 회사와 거래소 이윤의 증대이자 동시에 리테일 투자자들의 손실이라 본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을 하자면 보글에게 있어서 투자란 트레이딩이 아니었다. 잘 사고 잘 파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트레이딩은 기업의 주식을 장기적으로 보유해 기업의 이윤을 향유하는 투자 이념을 지닌 보글에게 거부감을 일으켰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전편에서 언급했던 투자의 제로섬 개념이다. 누군가가 시장 평균 대비 높은 수익률은 낸 다는 것은 반대편의 누군가는 낮은 수익률을 필연적으로 냄을 의미한다. 이는 곧 펀드를 상장시켜 ETF를 만들 경우 명목상으로는 ETF 자체가 상장지수펀드이기에 특정 인덱스를 추종하나 트레이딩의 과정에서 누군가는 ETF가 추종하는 지수보다 높은 수익률을, 다른 누군가는 보다 낮은 수익률을 내게 됨을 시사한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거래 비용을 감안하지 않은 이야기로 빈번한 거래량을 고려하면 거래비용은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수익률의 일정 부분을 깎아 먹게 된다. 즉 ETF 또한 제로섬 게임의 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스트는 보글의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뉴욕으로 돌아와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tate Street Globla Advisors)라는 자산운용사를 만난다. 그리고 1993년 1월 22일 마침내 S&P 500 지수를 기초로 미국 최초의 ETF를 상장시킨다. 펀드의 이름은 SPDR(Standard and Poor’s Depository Receipt) ETF이며 Depository는 펀드라는 창고를 의미하며 Receipt는 창고 안에 담긴 내용물(주식)에 대한 소유권을 뜻한다. 모스트가 평생에 걸쳐 일해 온 원자재 산업의 정수(창고 + 소유권)가 담긴 걸작인 ETF는 이후 SPY(SPIDER)라는 애칭으로 불리기 되며 현존하는 ETF 중 가장 큰 펀드가 되었다. 24년 5월 말 기준 SPY의 AUM은 530 Billion USD(7,000억 원)을 기록했다.


SPDR이 상장되던 1993년 모스트의 나이는 향년 79세였다.


SPDR ETF가 첫 상장한 날 / 출처: WSJ


모스트는 ETF의 창시자로서 상품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았다. ETF라는 창고는 전통자산인 주식뿐만 아니라 금과 같은 원자재 또한 기초 자산으로 지수화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전략이 아닌 액티브 전략 또한 담을 수 있다고 모스트는 예견했다. 실제로 State Street는 2004년 모스트의 임종 직전 2004년 11월 최초의 Gold ETF를 출시했다. 주식에서 시작된 ETF는 원자재 그리고 채권으로 확장됐다. 그리고 24년 1월 10일 최초의 비트코인 현물 ETF가 상장되며 ETF는 단순 전통적인 금융 자산 외에 디지털 자산까지 포괄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스트는 AMEX 이후 ISHARES라고 불린 ETF 상품들을 주력으로 삼는 Barclays Global Investors의 이사진으로 활동했는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Barclays는 재정 악화로 ISHARES 라인을 분리해 미국의 블랙록에게 팔았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채권 전문 운용사였던 블랙록은 이를 계기로 보글의 뱅가드를 제치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ETF 운용사로 진화하게 된다.


현재 24년 6월 시점 세계 3대 자산운용사들의 운용 규모는 다음과 같다. 이들은 모두 인덱스 펀드와 ETF를 앞세워 세계 최대 규모의 운용사로 등극했다.


블랙록: 10 Trillion USD(~1.3경 원)

뱅가드: 8 Trillion USD(~1.0경 원)

스테이트 스트리트: 4 Trillion USD(~5,000조 원)


모스트와 함께 AMEX에서 ETF의 상장을 진두지휘 했던 스티븐 블룸은 ETF의 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일개 상품으로 시작한 ETF는 이내 그 자체로 산업이 되었다”
“It started out as a product, and it became an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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