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경기 발열감은 몸 속 온도계가 일정하게 작동하지 않아 실제로는 덥지 않은데도 ‘덥다’는 잘못된 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데서 일어난다. (…) 에스트로겐은 체온조절에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열에 관한 메시지를 나르는 뉴런으로부터의 전달 사항을 차단하는 것이다. (…) 에스트로겐의 영향에서 벗어난 인체의 체온 조절 시스템은 아주 작은 온도 변화에도 굉장히 민감해져 과장된 방식으로 반응하곤 해서 마치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 뜨거운 여름날 두꺼운 옷을 입고 달리기를 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완경선언>
갱년기 우울은 주로 주름진 얼굴과 삐거덕거리는 몸으로 향한다. 어느 날, 백미러에 비친 내 얼굴에 필터가 씌어져 있었다. 유리창의 선팅 때문인 줄 알았다. 창문을 내려 보니 선팅한 유리보다 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날을 시작으로 하나씩 발견되는 내 얼굴과 몸의 칙칙함, 각종 처짐(차마 하나하나 밝힐 수 없는) 때문에 거울만 보면 화들짝 놀랐다.
갱년기 열감은 그렇잖아도 짙어진 다크서클을 더욱 선명하게 하고 얼룩덜룩하게 만들었다. 그 위로 쏟아지는 땀. 어떻게든 안색을 밝게 하려고 애쓴 화장이 한순간에 흘러내리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시로 붉어지는 얼굴 때문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가 경험한 열감과 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 샤워를 한 것처럼 머리카락에서 물기(땀)가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한겨울에도 반팔로 사는 사람도 있다.
“완경을 삶의 변화로 인식하고 나이 드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나라에 사는 여성들은 혈관운동증상의 고통이 덜한 경향이 있다. 비관적인 의미와 태도가 없으면 이런 증상이 정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이와 관련된 교육을 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일어날 일에 대해 이해하면 증상 때문에 괴로운 것도 줄어들 수 있다. 또 나이 들어가는 여성을 무시하는 사회에서는 완경기 발열감을 처음 겪으면 마치 유통기한이 지난 것 같은 느낌까지 받는다. ”
벌게진 얼굴과 수시로 흘러내리는 땀은 불편함을 넘어 ‘이제 끝났다’는 낭패감을 주었다. 사회는 젊고 건강한, 정상적인 몸을 원하는데, 특히 여성은 ‘풍만하고 날씬하며 건강하고 성적 매력을 풍기는 몸’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이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기준은 언제나 높고 나는 언제나 기준미달이었지만, 마치 이전에는 기준을 넘었던 것처럼 절망한다).
어려서부터 예쁘다는 말을 들어온 사람들은 더욱 타격이 크다. 큰언니가 그랬다. 큰언니는 어려서부터 예쁘고 건강하고 손도 야무져서 뭐든지 거뜬히 잘해냈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던 언니는 어느 날 자신의 벌게진 얼굴과 굽은 등을 발견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또,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다음날이면 거뜬히 일어났던 몸이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리 자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 몸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언니는 “벌써 이래가지고 어떻게 사냐...”는 한탄을 수시로 했다.
그에 비해 나는 셋째 딸임에도 불구하고 못난이로 불렸다. 한 번도 전성기를 가져본 적이 없어, '못생겨진' 얼굴에 남들만큼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부실하다’라는 말을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살았다. 딱히 잔병치레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항상 종이인형처럼 흐느적거렸고, 평생 건강에 문제가 있었고, 남들이 공감해주기 힘든 통증을 호소했다. 예를 들면, 청바지가 무거워서 허벅지가 아프다든가 목이 무거워서 머리를 기르지 못한다든가 어깨가 아파서 핸드백을 못 멘다든가. 가까운 친구나 동료들은 언제나 나를 열외로 두었다. 힘든 일을 할 때는 물론이고 노는 일이나 심지어 먹는 것까지도. 갱년기가 되면서 갖고 있는 지병은 더 심해지고 새로운 증상이 나타났지만, 그래도 질병에 익숙해서 그런지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크게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언니처럼 평생 예뻤거나 건강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낙차가 큰 사람일수록 크게 낙심한다.
나는 나이 들어 모두가 비슷해지는 게 때로는 만족스럽다. 그나마 공평하다고 할까. 그럼에도 급격히 늘어진 얼굴과 몸에 절망하고 우울해진다. 외모에 굴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다. 에스트로겐인지 뭔지 호르몬이란 놈이 제 맘대로 시스템 오류를 일으켜 제 멋대로 열 받는다. 어쩌면 우리는 ‘정상적인 몸’을 요구하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얼굴이 벌게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호르몬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도 여유 있게 땀을 닦고 부채질 몇 번 하면 그만인 것을.
정상적인 몸이란 도대체 뭘까. 정말 '보통'의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몸을 가졌을까.
장애여성공감의 공동대표 조미경 씨는 골형성부전증으로 골절의 상시적 위험과 함께 평생을 살아왔다. 그녀는 “옹알이하던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뼈가 부러지고 또 부러졌다. 100번 넘게 부러지던 뼈의 역사는 30대 이후” 더 이상 붙지 않게 되었고, 나이듦을 상징하는 휠체어나 틀니, 보청기, 돋보기 등을 전부 사용한다. “장애인이나 노년들 각각이 갖는 ‘자아 정체감’이 반드시 신체적 정신적 기능성이라는 조건과 일치하지 않는”데, 사회는 “몸을 펴고 열도록 항상 주의하고, 매일 그렇게 한다면 젊고 생명력 넘치는 외모를 유지할 수 있”고 “쉰 살에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예순 살의 모습이 결정된다!”(<완경기, 그게 뭐가 어때서?>)며 젊은 외모를 유지하도록 요구한다.
어차피 정상적인 몸을 벗어난 김에 사회의 시선과 규범도 벗어나 보면 어떨까. 겨울에도 반팔을 입으면서, 강의할 때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땀 좀 흘리면 어때, 얼굴이 좀 붉어지면 어때, 늙은 게 뭐 어때, 뻔뻔해진다. 뻔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금의 상태로 살아야 하니까.
더 나아가 정상성을 전복한다. “노년들이 일상에서 보이는 무능은 단순히 생물학적 이유만은 아니며, 오히려 이 세상이 청년기와 중년기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왜 예쁜 얼굴로 땀방울 하나 없이 젊은 사람만 ‘일반적인’ 모습으로 상상하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하고 때로 못 생기고 때로 보기 괜찮은 얼굴이고, 매운 음식을 먹을 땐 기분 좋게 땀을 흘리기도 하고, 다양한 연령층이어서 또래를 찾아 헤매기까지 하는데.
“트랜스젠더 노년을 만나기 어려운 건, 심한 우울증 등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늙어가는’ 즉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지는 트랜스젠더가 드문 까닭도 있다. ...그래서 트랜스 젠더의 나이듦은 발명되어야 할 정치적 의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누군가는 늙어간다는 것도 정치적 투쟁이다. “노년이 되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노년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중요한 투쟁이 되기도 한다. “‘정말 50대가 있을까 60대가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상상조차 투쟁해서 얻어“내야 한다. 늙어가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 갱년기를 통과해야 늙어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니. 갱년기를 통해 비정상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정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말인가를 통감하게 된다.
“청소년 운동은 연령주의와 싸우는 운동이거든요. ...그래서 노년과 친구가 된다면?‘이런 질문이 어색하기도 해요. ’이 사람‘과 이야기하는 거지, 10대나 40대 같은 세대의 대표자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며칠 전 종점에서 전철을 타는데(우리 동네), 한 청년이 무거운 짐을 들고 반대편으로 내려가려 했다. “거기 아냐, 이리로.”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순간 멈칫했다. 아, 연령주의도 오류구나. 호르몬만 오류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정신도 오류를 일으키는구나. 딴에는 도움을 주려고 한 말이지만, '이 사람'이 아니라 '어린' 청년만 보았구나. 이제 호르몬 탓 그만해야겠다. 갱년기는 규범에서 벗어날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