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Oct 25. 2024

가슴통증과 화병? No,자기 돌봄!

완경선언

  

“정말 오랫동안 그냥 목청이 터져라 길게 비명을 지르고 싶은 마음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공에 대고 비명을 지르는 일은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결국 지치게 마련이고, 자신을 돌보거나 변화하는 일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내 분노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만 그 분노가 내 머릿속을 무허가 점거하는 것을 막고, 그 힘으로 건설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나는 문제의 핵심을 더 뚜렷하게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완경선언>     


이 문장을 보자마자 나의 덕질이 생각났다. 나는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평생 해보지 않은 덕질에 빠져들었다.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라는 한 권의 책을 쓸 정도로. 책에는 수많은 덕질의 이유를 설명했지만, 어쩌면 나도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지르고 싶어서 록음악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쉬지 않고 두들기는 드럼소리와 사이키델릭한 기타소리, 심장소리 같은 베이스 사이로 보컬의 미친 듯한 고음을 들으면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거기서 나도 힘껏 뛰고 소리 지르며 내 안의 찌꺼기들을 있는 대로 발산해야만 했다.      

흔히 화병이라고 하는 진단명을 자주 들었다. 남들에 비해 대단한 스트레스가 있어서라기보다 좀 더 예민한데 표출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넘겼다. 그런데 어느 날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이 아팠다.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아서 이불을 둘둘 감아 끌어안아야 했다. 마치 구멍 난 가슴에 이불을 쑤셔 박듯이.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커지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꼈다.

밤이면 이불을 끌어안고 낮이면 다시 멀쩡해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정말 화병이 있었구나, 내가 정말 예민했구나, 내가 정말 표출하지 않고 살았구나, 내가 참 안쓰럽구나. 이제라도 보살펴주어야지.


그날부터 나의 모토는 ‘자기돌봄’이었다. 번아웃이 된 줄도 모르고 참고 살아온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갖고, 나를 돌보는 여러 방법들을 강구했다. 매일 산책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잘 먹였다. 살림, 나를 잘 먹이고 살리는 일에 매진했다.       

살림이라니, 밥이라니. 평생 밥을 차려온 여자들에게 밥은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귀찮은 노동이 아닌가. 사무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지옥철에 시달리고 돌아온 몸을 잠시 뉘지도 못하고 밥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인데, 돌밥(돌아서면 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너무 자주' '너무 꼬박꼬박' 돌아오는 그 일을 다시 하라니. 스스로 정하고도 기가 막혔다. 더구나 살림은 사회적으로 가장 평가절하 되어온 영역이 아닌가.

밥에 공을 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예전처럼 있는 밥 있는 반찬으로 대충 먹는 시대가 아니라서 더 그렇다. 세계화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이 바로 입맛이 아닐까. 입맛은 더 다양하고 고급한 것을 원하게 되었다. 뭐든 내 뜻대로 잘 안 되는 몸이지만 특히 한 치 혀를 만족스럽게 하는 일이 제일 잘 안 된다. 그렇다고 너무 요리에 재미를 들여서는 안 된다. 살던 대로 사는 게 제일 쉽지만, 갱년기 이후에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나로 살기 위한 무언가, 나의 경우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하면서 정성껏 먹이고 정성껏 재우고 정성껏 입히고 정성껏 돌보아야 한다.      


우리 세대는 자신을 돌보는 게 제일 어렵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구호에 속아 성실과 열심을 뼈에 새기고 살았다. 평생 놀아보지 않은 자가 자신을 돌본답시고 ‘잘 먹기’를 하기란 지나친 노동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사느라 애쓴 몸과 마음을 돌보자는 건데 뭐 그리 ‘놀고먹는’ 일이라고 우리 세대는 이걸 이다지도 어려워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50여년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으면 burn out, 다 타버린단 말인가.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돌보는 일을 ‘놀고먹기’로 생각하는 버릇을 어찌할까.

그렇다면 조금 강력한 방법을 써본다. 이제부터 노동금지, 성실금지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일만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강박도 금지다. 세상은 점점 자동화되고 노동보다 재테크나 투자가 훨씬 더 경제적 가치가 높은데 나는 여전히 노동만 중시하고, 사회활동 등 사회적 기여를 할 때조차 스스로 위축되어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 못하니 이를 어쩌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sns에 포스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류유산을 축적하는 활동을 하는 거고 사회에 크나큰 기여를 하는 중이다.

아니 아니,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거창한 대의도 잠시 내려놓고 더 나은 일상에만 집중한다. 그러니 스스로를 추앙하는 것 외에는 남들에 의한(또한 대한) 추앙도 금지, 연대도 당분간 금지다.  


여전히 활기 있게 도전하는 수많은 시니어들이 있다. 은퇴하지 말고 하던 일 계속하라고, 버티는 게 살아남는 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외연을 쌓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내면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화산처럼 터져 결국 화병을 얻는다.

갱년기를 지나는 시기만큼은 잠시 멈춰서 살살 몸을 달래고 마음을 달래는 살림을 하면 좋겠다. 평생 일에 매진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기느라 자신을 돌볼 틈을 갖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자신을 살리는 돌봄력(!)을 갖지 못하면 자신의 집에서 말년을 보내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좋은 삶을 살고 싶지 훌륭한 삶을 살겠다는 욕심은 없다. 

실컷 덕질을 했다. 덕질은 오로지 우러르는 대상을 향한 것이라 질투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종교와 같다. 실패하는 나를 인정하고 아픈 나를 인정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나를 인정하고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했더니 이제 소리 지르고 싶은 생각은 가라앉았다.  덕력을 키우고 게임레벨을 키우며 돌봄력을 키운다. 아이돌을 키우고 국민가수를 키우는 덕질도 결국 내 영혼을 돌보는 일 아니겠는가.

할머니들을 보라. 어느 구석진 곳이든 흙만 보면 씨를 뿌려 작물을 키워내지 않는가. 할머니들이 도시에 있는 자식 집에 가는 것보다 평생 호미로 가꾼 내 땅 옆에 있으려는 이유는 인생 굽이굽이마다 사무치던 사연을 땅에다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땅에 엎드린 할머니들을 보면 저분들의 돌봄이 인류를 살렸지 싶다. 때로 돌봄은 세상과 연결되어 이웃과의 공동체적 연대 같은 더 큰 돌봄으로 확장해 나가기도 한다.     

  

“일시적인 정지 상태가 있을 수 있지만 완경이행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빠지는 것이라기보다는 휴식과 같다고 볼 수 있다.”완경선언     


생의 시기마다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이 달라진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미루고 의미 있는 일에 매진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나를 돌보는 일에 매진할 때다.   


   

덧. 누군가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먹는 걸로 자기돌봄을 하고 누군가는 먹는 것보다 운동에 주안점을 두기도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돌봄을 하되, 스스로 살리는 힘을 기르는 것이 핵심이다.      

이전 02화 갱년기 열감? No, 다르게 보기/ 정상성의 전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