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그 사람이 당신 옆에 있을 거란 착각

감성의 언어로 말해요

by han


우리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감성을 배제한 이성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른 체.


지금 23살 된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일이다. 두 명의 선생님이 한 개의 반을 맡아서 가르쳤다. 어느 날, 선생님 한 분이 장난 삼아 앞에 있는 두 선생님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물어봤다. 5살 된 아들아이는 망설임 없이 ‘아빠’라고 짧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아이가 질문의 요지를 잘 못 파악한 것으로 이해했는지, ‘그게 아니라, 아빠는 빼고 여기 있는 두 선생님 중에서?’라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아빠’라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몇 번을 물어봐도, 그 예쁜 유치원 선생님들은 ‘아빠’라는 답답하고 허망한 대답만 들어야 했다. 그녀들은 속 터질 정도로 완고한 아이에게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질리지 않았을까.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은 아이는 좋은 것과 최고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이미 아이의 가슴속에는 아빠라는 감성이 꽉 차 있었다. 절대로 그 위대한 자리를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아빠에 대한 믿음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그것은 딸아이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나와 아이들 사이가 이렇데 유지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가정은 이성과 합리를 따지는 장소가 아니라 감성의 공간이어야 한다. 난 아이들을 대할 때면, 과거의 나를 어김없이 소환해서 감성적으로 같이 유치해졌다.


‘사랑해, 잘했어, 멋져, 최고야’라는 긍정의 언어를 입에 달고 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안아 주었다. 나이 듦의 좋은 점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해맑은 유년기도, 질풍노도의 사춘기도, 겉멋들은 청춘기도 차곡차곡 쌓여있다. 필요할 때마다 변신하고 꺼내 쓰면 된다. 그때로 돌아가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그렇게 난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눈높이를 맞추고 이성과 합리는 철저히 따뜻한 감성으로 감싸서 전달해야만 했다. 그것은 '이성'이란 무형의 존재는 극한의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준 지 얼마 안 된 수 십만 원짜리 스마트 폰이 처참하게 부서져서 왔다. 난 딸아이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그게... 뭐! 그... 그래서 그게 다 그런 거지 뭐! 그치~”

“맞아, 아빠. 요즘 스마트 폰이 너무 약해!”


가족들 앞에서 가뜩이나 미안한데 거기다 대놓고 ‘조심하지, 그게 얼만데’ 등 하며 타박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다. 게다가 영양에서 청주 학교까지 주말마다 왕복하는 여자아이에게 다시 안 사줄 수도 없다. 속은 엄청 쓰렸지만, 중요한 것은 딸아이의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 주는 게 먼저였다. 이렇게 난 아이들이 잘못했거나 실수를 해서 미안해할 때면 띄어쓰기하듯 더듬거리며 말도 안 되는 우스게 소리를 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따뜻한 감성의 언어로 포장한 것이다. 그럼 아이들은 기가 살아 금방 웃고 자신감을 내보인다. 그 첫 번째 대상이 항상 아빠라서 문제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이성과 합리를 감성으로 감싸서 전달하는 방식은 부부나 연인 관계에서도 필요하다. 흡사, 투명 유리구슬을 흔들면 찰랑거리며 반짝이는 차가운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여주는 스노 볼처럼 말이다. 구슬이 따뜻한 감성이라면, 속에 반짝이는 눈발들은 차가운 이성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그 반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감성은 유치하기에 이성보다 낮고 쓸모없는 가치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성과 합리’라는 금속성의 차가운 구슬 안에 감성을 담아 보이지 않게 숨겨놓는 오류를 범한다.

감성으로 싸여있지 않은, 극한의 차가운 이성으로만 이루어진 말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본인이야, 모두 너를 위해, 가족을 위해 한다고들 하지만, 그 소름 돋는 차가움이 가슴에 대어질 때 순식간에 심장이 멈추는 듯 소스라치게 놀라고 상처를 입는다. 이제 자기 보호본능이 작동한다. 더는 다치는 게 싫어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마저도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하는 책임 전가가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면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고 끝내 누군가는 미련을 버리고 쓸쓸히 떠나간다. 자식, 아내, 연인이 내일도 당신 옆에 있을 거라는 확신은 착각이다. 빨리 깨어나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선,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해서 그 사람이 떠나갔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 전체가 책으로 배운 이성과 합리론에 매몰됐기 때문이다. 400년 전에 책을 쓴 저자는 그 당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썼지만, 현재 사람은 읽기만 했다. 결국 사람은 보이지 않고 이성과 합리만 떠돈다. 그것을 신봉하는 거룩한 지식인들이 데카르트와 칸트를 우아하게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와도 이해하지 못한다. 알맹이 빠진 책 내용과 예술작품을 열심히, 그것도 어렵게 나열하는 것을 품위로 착각하는 늙어 버린 사회다. 감성이 사라지면서 역동성도 함께 사라졌다. 이성과 합리란 거대한 투명 온실에 갇혀 서서히 말라죽어가는 나무처럼. 세상에는, 멀리서 바라보면 아무렇지 않게 보여도 ‘이성과 합리’라는 무형의 폭력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도 힘겨운 사람이 많다.


어쩌면, 내가 농사를 지으며 땀을 흘리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파도치는 바닷가에 서 있는 것은 그렇게 말라죽기는 싫어, 온 힘을 다해 저항하는 나름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힘겨운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이 글을 보낸다.

keyword
팔로워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