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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파도를 타는 기획자

발산과 수렴 그리고 좌절과 희망의 파도타기

by 모일자 Mar 06. 2025

기획자는 평지를 달리는 사람이다. 


이 문장이 초년차 기획자때 했던 가장 큰 착각이었습니다. 특히 오랜 기간 동안 잘 닦아놓은  이론을 오랜 기간 공부했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론은 명쾌했으니까요. 기획 실무를 처음 접하면서 왜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이 안되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분명히 이론에서는 세상이 도형과 선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빈틈을 그리고 끊어진 선을 저의 기획으로 쉽게 매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기획은 좌절과 희망의 파도타기였습니다. 발산과 수렴의 파도타기였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다가도 어느새 방법을 찾고, 방법을 찾아 머리가 단순해졌다가도 다시 문제를 만났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 걸렸습니다. 파도가 오는지도 몰랐다가 부딪치는 것이 다반사였고, 파도를 억지로 뚫으려 하다가 좌절했습니다. 기획이 파도타기라는 사실을 일찍 인지했다면 조금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글을 통해 기획 과정에서 파도를 타는 느낌을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1. 기획의 시작 : 점

기획의 시작은 하나의 점입니다. 어떤 개념이나 구조 혹은 작은 아이디어를 해보면 어떨까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하나의 점에 추가적인 생각이 붙으며 어느덧 잘하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정확히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모릅니다. 이 순간이 프로젝트를 자신 있게 발의해야 되는 최적의 순간입니다. 물론 어떻게 할지 작전이 완벽하지 않아 불안감은 있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기획의 타이밍이 어긋납니다. 약간의 불안감을 갖고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그것을 채우는 일하는 과정이 의미 있습니다. 유의할 것은 될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확신이 없으면 시작의 타이밍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급하게 시작을 했다가 시간에 쫓기며 불안감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2. 1차 발산/좌절 : 세상을 끌어당기는 담당자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발의하며 담당자가 되는 순간 후달립니다. 정확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상태로 시작했으니 당연합니다. 담당자의 후달림은 그가 만나는 세상을 지금 하고 있는 고민으로 끌어당깁니다. 처음 기획을 시작할 때 점은 이 과정에서 면이 됩니다. 면이 되기 시작한 즉후에는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며 나의 방향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그러나 동시에 상상이 아닌 현실 세계를 만나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현실 세계는 고려할 요소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될 것 같다고 한 생각이 쉽지 않겠는 데로 바뀝니다. 만약 생각보다는 어렵겠지만 뭔가 계속하다 보면 될 것 같다는 감정이 유지된다면 프로젝트를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현실과 상상의 괴리를 맞춰가는 당연한 단계입니다. 망했다는 감정에 급하게 프로젝트의 방향을 틀면 안 됩니다. 다른 방향에서도 똑같은 감정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3. 1차 수렴/희망 : 프로젝트의 의미와 이름

면이 된 기획은 줄다리기를 지속합니다. 한쪽에서는 될 것 같다는 상상을 강화하는 증거를 제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안될 것 같다는 현실을 강화하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줄다리기 과정을 통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모기장 같았던 기획은 점차 촘촘하고 고밀도의 종이가 되어 갑니다. 비로소 상상이 현실과 만나 진정한 의미의 기획서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프로젝트의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비로소 내가 하는 일을 한 줄의 문장으로 하나의 단어로 이름 붙일 수 있는 순간입니다.


4. 2차 발산/좌절 : 큰 기획과 만나는 순간

기획이 점을 지나고 모기장을 지나 한 장의 빳빳한 종이가 되었다면 더 넓은 세상에 그것을 내보일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기획이 내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나보다 더 넓게 보는 상위 보직자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보직자는 필연적으로 실무자보다 지만 넓게 봅니다. 그는 나의 기획서 1장을 보지 않습니다. 다른 기획서와의 연계 그리고 다른 상황과의 연계를 봅니다. 기획서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이런저런 선이 연결됩니다. 3차원 공간으로 연결되기 시작한 기획은 복잡성이 더 높아집니다. 나의 작은 기획은 더 큰 기획과 만납니다. 명확하다고 생각하던 프로젝트의 의미가 전제 그림에는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도 받습니다. 그러나 면으로 보는 기획이 익숙했기에 3차원 퍼즐의 한 면 만을 봅니다. 한 면은 맞췄지만 다른 면을 보니 어느새 어긋나 있습니다. 점점 지쳐갑니다.


5. 2차 수렴/희망 : 큐비스트가 된 기획자

한 면씩 큐브를 맞춰가던 기획자는 어느덧 여러면을 보면서 하나씩 포석을 둘 수 있게 됩니다. 큰 기획을 하면서 그리고 연결된 상황을 보면서, 지금 내가 하는 작은 기획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작은 기획은 한 동작 한 동작 큐브를 맞추듯 켜켜이 쌓이며 큐브를 완성해 갑니다. 나의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전체 판이 움직이는 것을 보며 프로젝트를 최적의 위치에 포지셔닝하려고 노력합니다. 충분히 과정을 축적한 큐비스트는 완성된 큐브를 내려놓습니다. 비로소 한 단계 기획의 사이클이 끝이 납니다.


큐브를 맞추면 기획이 끝이 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3X3X3 큐브는 5X5X5 큐브가 되곤 합니다. 또 때로는 외부의 힘으로 인해 큐브가 어긋나 더 이상 맞출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기획은 살아있는 세상의 빈틈을 메꾸는 일이기 때문에 매일 불확실성에 놓여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발산과 수렴 그리고 좌절과 희망의 파도를 온전히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파도를 타는 서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파도를 기민하게 느끼더라도 예상치 못한순간에 파도는 나를 위로 올리기도 아래도 내리기도 합니다. 이때 억지로 파도를 거스르려는 마음으로는 파도를 계속탈 수 없습니다. 잘된다고 거만하지 않고 잘 안된다고 좌절하지 않는 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평형과 정반합에 대한 믿음이 한번 파도에 쓸려가더라도 우리를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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