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불안을 보면 어떤 기획자인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미디어에서 접하는 기획자는 확신으로 차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자신만을 길을 걸어간 모습을 보여줍니다. 걸어간 길의 발자취로 모두가 아는 위대한 성과를 보여줍니다. 그가 만든 브랜드, 사업, 서비스, 건물, 제도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성취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접했던 기획자이자 연구자인 교수님도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항상 정답을 알고 있었고 항상 방향성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좋은 기획자가 되고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을 때 확신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찬 저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회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근거리에서는 선배들 팀장님 멀게는 임원 ceo 등 회사의 모든 이들이 나보다 경력이 높은 시절에 봤던 그들은 확신으로 차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실제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차 있어주실 원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따라갈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확신의 차서 배를 이끌어가는 선장님이 있고 저는 열심히 노를 저어서 따라가면 어느새 나도 확신에 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는 때때로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차서 방향성을 제시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나 피드백을 받습니다. 제가 선배 기획자들을 보고 느꼈던 확신의 감정을 누군가는 저를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성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획을 하는 전체 과정을 100이라고 하면 최소 7할 이상을 차지하는 감정은 확신이 아닌 불안입니다. 이제는 직장인의 끝이라는 임원, 정년퇴직에 가까운 선배들의 감정을 조금은 편하게 듣게 되는데 그분들도 비슷했습니다. 임원이라고 흔들리지 않는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없고, 그 역시 아니 저보다 더 불확실성과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느껴집니다. 이제는 문화가 예전보다는 말랑말랑해졌기에, 임원들도 본인이 모두가 바라보고 쫓아갈 비전을 제시할 수는 없다고 각자가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 또한 후배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요.
기획자는 짧은 확신과 긴 불안으로 살아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0% 내가 알고 있다면, 애초에 기획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빈틈은 당연히 모르기 때문에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채워져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빈틈을 채우려 노력하는 기획자는 불확실성에 온전히 몸을 맡깁니다.
내가 정말 세상의 날것을 그대로 인지하고 있나?
내가 모르고 있는 중요한 변수가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방향성이 맞을까?
지속가능하게 실행될 수 있는 방법일까?
내가 주장하는 구조가 최선이 맞을까? 등
기획 과정을 통해 불안을 야기하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답해나갑니다. 그리고 이 답들은 모여서 작은 확신이 됩니다. 그리고 확신이 된 많은 불안의 자리를 새로운 불안이 채웁니다. 이렇게 기획자가 오랜 기간 기획을 해나가는 것은 마치 긴 불안을 응축하여 밀도가 굉장히 높은 확신으로 바꿔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단순히 불안으로 쌓여만 있고 불안으로 인해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모아 고압의 프레스로 눌러 차곡차곡 확신을 쌓아가는 감각을 느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확신이 불안에 비해 너무나 얇고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내가 기존에 접하던 확신에 찬 기획자의 모습과 너무나 동떨어져 심각한 괴리가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맞는 방향인가라는 고민과 방황을 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렇게 오래 고민하고 뭔가를 해냈는데, 손에 잡히는 확신은 가시적이지 않고 계속 불안으로만 차있으니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불안과 치열한 마주함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을 만한 밀도의 확신으로 켜켜이 쌓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역치가 지나면 분명히 스스로 느낄 수 있고 다른 사람도 느낄만한 크기의 확신이 됩니다.
이렇듯 불안은 기획자를 나아가게 하는 힘이자 원동력입니다. 또한 불안을 느낄 수 있는 것 자체가 기획자의 자질입니다. 질문하지 않고 빈틈을 보지 못하는 기획자는 불안을 느끼지도 않으니까요. 대신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 그리고 어떤 영역에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해 나갈지입니다. 불안을 없애야 되는 대상이 아닌 평생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대신 어떤 불안과 만날 것인가 선택에 집중해야 좋은 기획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함께하는 불안 함께할 불안이 곧 기획자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의미 있는 불안을 선택하는 힘이 기획자의 역량이자 미래에 어떤 기획자가 될 것인지를 결정짓는 요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