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빛이 눈가를 떠다녔다. 아침이었다. 위치상 사수 곁에서 그대로 잠이 든 듯했다. 사수는 없었다.
지난 새벽 사수 곁에 누운 뒤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걸로 미루어, 나는 그길로 숙면에 든 모양이었다. 작은 창으로 부서지는 한 줄기 볕을 온몸으로 반사하며 자아는 지금도 잠에 취해 있었다. 나 아닌 다른 이가 물린 그것…… 수실라의 나눔은 경이로웠다. 생후 한 달 차인 아기가 7시간째 통잠이라니. 자아는 모유 스멜을 통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안정을 찾은 듯했다.
욕실로 향했다. 사흘이나 닷새나 어느 정도 자란 수염은 더 길어 보이지도 더 짧아 보이지도 않았다. 얼핏 스치고 말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입관. 내게는 수수께끼 같은 그것의 과정을 어림잡아보며 간결한 세수와 양치를 마쳤다. 단호한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상당했다. 이번에야말로 상주의 역할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되었다. 새하얀 마스크로 매무시를 단정히 한 뒤 재빨리 빈소로 나왔다. 대기실 벽시계가 9시에 임박해 있었다.
눈에 띄는 건 창가 그 자리에 놓인 스님의 바랑뿐, 빈소는 한산했다. 주방도 마찬가지.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을 뿐 인기척은 없었다. 상 위엔 김 나는 흰밥과 육개장, 조문객 상엔 올라온 적 없는 달걀말이, 그리고 반듯하게 접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텅 빈 빈소를 다시 한번 휘 둘러보며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깨워도 깨워도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입관이 갑작스레 당겨졌어. 새벽에 입관실 천장이 내려앉았거든. 굉음에…… 비명에…… 자아는 자면서도 경기를 하고…… 말도 마. 기억에 없는 그 시절 전쟁통이 그랬을까 싶더라. 하여튼 지금은 공사 중이라는구나. 그래도 입관 전에 미리 무너진 게 어딘가 싶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더는 다치지 않았으니. 현재 시각 오전 8시 30분. 끝내 널 못 깨우고 가지만 걱정은 없구나. 곧 통잠에서 깨어난 자아가 나 대신 널 깨울 테니까. 멀리서 지켜보니, 자아의 통잠은 길어야 5시간이던데 수실라의 은혜 덕인지 오늘은 그 난리통에도 더 자는구나. 아멘. 너도 알다시피, 생후 한 달 된 신생아가 두 끼를 건너뛰고 7시간 이상 통잠을 자는 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그 보고가 드문 일이지. 그걸 내게 깨우쳐준 아기가 바로 신생아 시절의 자비 너였고. 후후…… 그때 아찔했던 거 생각하면…… 이런, 아니다, 아니야. 이러다간 옛이야기까지 쓸 것 같구나. 입관은 옆 동네 장례식장에서 진행될 거야. 다녀오마. 상주, 빈소를 부탁한다.』
성적표 등, 주로 교육 기관 측의 보호자 확인 서류에 위조해온 사수의 글씨체였다. 천장이 무너졌다니…… 입관 역시 상주 없이 진행될 수 있다니…… 조금 전 욕실에서 나 홀로 짐작해본 그것의 과정. 그 선두에 개선장군처럼 서 있던 내 모습이 나는 불쑥 쑥스러워졌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들이 누운 관을 비장하게 쓰다듬는 나. 결국 뒤돌아서 눈물 두어 방울을 떨구는 나. 부서진 그들을 붙잡고 통곡하는 사수와 식구들. 하얀 장갑 낀 손으로 그들을 일일이 다독이며, 어서 관을 밖으로 내어가 달라고 관계자에게 점잖게 눈짓하는 나. 그러는 내내 자아는 내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지금 내가 식구들과 함께 입관에 나섰다 해도, 나는 자아를 품에 안은 채여야 했다. 선두는커녕 그 행렬의 맨 뒤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아에게 단추와 단추 사이를 내어주고, 둥가둥가 몸을 흔들며 믿을 수 없이 참혹하게, 혹은 평온하게 누운 그들을 그저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이제, 멀어지는 그들을 부르짖으며 쌍욕을 뱉거나 바닥을 구르거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곳에 있어도 되었다. 우리가 있는 그곳이 어디든, 우리가 그들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내게 이 서신을 남기며, 사수는 빈소를 부탁한다는 부분에서 분명 마음속으로 힘을 주었을 것이다. 종이가 펜 끝을 버티지 못해 그 부분에만 구멍이 나 있었다. 그나저나, 지금도 시야 가장자리에서 어룽어룽하는 저 샛노란 색. 그만큼 신경 쓰이는 저 새빨간 색. 대장 조리사는 보육원 주방에서 가마솥과 함께 달걀도 챙겨 온 걸까. 나는 달걀말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색감도 두께도 높이도 냄새도 집에서 먹던 것과 똑같았다. 조각 하나하나에 3단으로 그려진 하트 모양 케첩까지도.
그러고 보니 떡 몇 알 먹은 게 전부였다. 얼마나 데운 건지 육개장에선 아직도 끓는 듯 김이 났다. 조문객이 집중적으로 밀려든다는 장례식 이튿째 날. 오늘은 더욱 바빠질 터였다. 바닥을 치는 식욕과는 상관없이 조금은 먹어두어야 할 듯했다. 굶고 쓰러지고 실려가고 벗겨지고…… 아마 그런 일은 내게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굶어서 쓰러진다니, 그것부터가 그럴 리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는 일은, 기억에 없는 18년 전에도 넉 달 전에도 한 달 전에도 바로 어제도 오늘 새벽에도 조금 전에도 내게 일어났다. 내가 있기에. 어떤 극한에서도 결국엔 먹고 자고 싸는 건강한 나를 거대한 숙주로 삼아. 나의 그럴 리 없는 일은, 나의 수없는 그럴 리 있는 일 아래 일어난다. 내가 있는 한. 우리가 있는 한.
나는 가슴을 펴고, 들어 올린 어깨를 툭 내려놓으며 어젯밤 사수처럼 밥 한 숟갈을 육개장에 말았다. 한 숟갈, 한 숟갈, 한 대접을 비웠다. 마지막 달걀말이 한 점까지 욱여넣고 막 물을 들이켠 그때 누군가가 콕콕 내 등을 찔렀다.
"안녕하심니꽈."
나는 상 위에 놓인 마스크부터 썼다. 턱에 걸쳐두었었는데, 이왕 먹는 거 편히 먹고 싶어서 아예 벗어놓았다. 후닥닥 마스크를 귀에 거는 찰나의 틈으로 들이치는 익숙한 냄새. 역시나 등 뒤엔 내 친구 에인젤이 서 있었다. 토마토를 가득 안고.
"에인제헤헬!"
반가움 반 놀라움 반. 내 목에서 평소와는 다른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래도 '에인젤'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은 내 귀에 비교적 정확하게 들려왔다.
"누구심니꽈?"
오랜만이어서일까. 마스크와 남성용 상주복으로 무장한 행색 때문일까. 에인젤의 목소리엔 놀라움뿐이었다. 나를 향해 눈꼬리를 키웠다 좁혔다 할 뿐 에인젤은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친구이다 뿐인가. 에인젤과 나는 절친이었다.
2년 전, 외국인 노동자 센터의 유일한 직원이자 아르바이트생인 에인젤은 도다리 부부와 함께 자람 보육원에 처음 봉사활동을 왔었다. 에인젤이 스무 살, 내가 열여섯 살 때였다. 덩치만 보고 내가 언니인 줄 알고 괜찮다고, 편히 말 놓으라고 했는데 없는 민증을 까라고 해서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의 외국인등록증을 내게 내밀며 장난스레 우쭐대던 에인젤. 그들이 보육원으로 향할 때, 내 주요 신상은 도다리에 의해 이미 에인젤에게 탈탈 털렸다. 있어, 가면, 또래. 봉사활동은 처음이라며 에인젤이 긴장하자 도다리가 내린 조치였다. 외국인 노동자 센터장 도다리는 영어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어에 넓고 얕게 능통했다.
에인젤은 그 뒤로도 종종 도다리 부부와 보육원을 찾아왔는데, 언제가부턴 혼자 들렀다 금세 사라져버리곤 했다. 에인젤이 왔다 갔다는 걸, 보육원 복도에 진동하는 토마토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에인젤은 토마토 농장에서 투잡을 뛰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투잡은 한국어로 겹벌이라고. 말로 덧붙인 건 아니고 종이에 발음 그대로의 영어로 써주었다. 한국 입성 6개월 차, 한국어에 서툰 에인젤은 한국어로 대화할 때 입보다는 손과 발을 많이 썼지만 한국어 공부엔 진심이었다.
에인젤은 봉사활동 첫날 바로 내게 접근했다. 내가 현재 자람 보육원의 맏이라고 도다리가 밑밥을 깔아놓았기 때문이었다. 장녀인 에인젤은 나와 죽이 맞았다. 우리는 맏이의 사명감을 들먹이며 동생들을 돌봤고, 함께 먹을 간식도 만들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게 소통의 걸림돌이 될 순 없었다. 세상에는 몸짓 하나로 가능한 일도 많으니까. 말이 필요 없는 일. 자연스레 공감의 공기가 형성되는 일. 그 공기로 서로가 호흡하는 일. 그렇게 각자의 순간을 살아내는 일. 토마토수프가 맛깔스럽게 완성된 어느 날, 에인젤이 나를 향해 불쑥 손가락 여섯 개를 들어 보였다. 나는 바로 알았다. 에인젤은 필리핀에 있는 동생만 여섯 명이란 뜻이었다. 나는 엄지와 중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대장 조리사가 사수에게 자주 날리는 부처님 포즈. 오케이, 우리는 결국 피차일반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한마디 말없이 완벽한 공감에 이른 우리는 그때부터 절친이 되었다. 눈만 마주치면 킥킥댔다. 그런 에인젤이 지금 내게 누구심니꽈, 라고 묻고 있었다.
"나야, 자비."
"자뷔이이이?"
에인젤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이 와중에도 벗기는커녕 단속하기 바쁜 마스크와 난감한 사이즈의 남성용 상주복 등에 대해 에인젤은 어떤 해명을 원하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망설이는데, 에인젤이 대뜸 품에 안은 토마토를 내려놓고 콩콩 뛰며 박수를 쳤다.
"오케이! 자뷔 보이스! 자뷔 허스키 보이스!"
우리는 함께 노래를 흥얼거린 적도 많았다. 화성을 쌓았고, 감정이 최고조에 오르면 칼군무를 추었다. 에인젤은 하드 록을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지만, 하드 록의 불모지에서 야심 차게 발표했으나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데뷔 무대를 은퇴 무대로 장식한 우리나라 최초 하드 록 밴드의 노랫말까지 줄줄이 꿴 그것으로 충분했다. 발음만은 끝장이었다. 위 아 더 월드. 타국의 한 줄 노랫말에 스며들기 위해 에인젤이 쏟았을 그 피눈물의 농도를 나는 안다. 에인젤은 나처럼 가수가 꿈이다. 물론 하드, 로커. 그러고 보니 에인젤과 마지막으로 헤드뱅잉 한 게 언제였더라…… 나는 괜스레 머리칼을 허공에 털어보았다.
"에인줼."
우우워! 깜짝이야! 그때 저만치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웬 남자 목소리였다. 나처럼 어정쩡한 저음은 명함도 못 내밀 초중저음 발성. 빈소가 통째로 심해에서 물결치는 듯한 거대한 울림이었다. 깔끔하고 깊다는, 광고 속 까나리 액젓의 감칠맛이 이럴까. 남자라는 단서와는 무관하게, 그의 톤엔 까나리 액젓 한 병으론 안 될 어마어마한 감칠맛이 있었다. 나는 구미가 확 당겼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는 에인젤을 따라 나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
우우워워?! 여자? 여자라고? 나는 빈소 입구를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칼을 양쪽 어깨 위로 늘어뜨린 한 외국인 여자가 두 팔을 함빡 벌린 채 빈소 신발장에 기대서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서 씨익 윗니가 드러났다.
"살라자!"
에인젤이 그녀를 향해 뛰었다. 신발장에 기대선 여자가 두 팔을 오므리며 달려온 에인젤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들이 서로를 꽉 끌어안은 채 뱅글뱅글 돌았다. 그사이 여자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고 매미처럼 매달린 에인젤의 윗니는 인간의 최대치로 드러났다. 에인젤의 모국 필리핀의 문화일까. 그들만의 문화일까. 일행인 듯한 그들은 남의 가족 장례식장에서 하염없이 밀착했다. 서로를 죽어도 보낼 수 없다는 듯, 하염없이 돌며 하염없이 웃었다. 마침내 다 돌았는지, 윗니를 삭 감춘 그들이 침통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곧 떠오를 듯, 새털 같은 발짓으로 땅을 맴돌던 그들이 열 발가락 하나하나에 돌덩이를 얹은 듯 무람한 걸음으로 내게 가까워졌다. 나는 절친인 에인젤보다도 초면의 여자에게 더욱 눈길이 갔다. 여자가 한 발 한 발 내딛는 만큼, 여자의 긴 머리칼이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등 뒤로 넘어갔다. 여자의 윤곽이 점점 선명해졌다. 여자가 선명해질수록, 나는 실제로도 그녀가 에인젤보다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자를 대고 그은 듯 네모반듯한 얼굴. 너른 어깨. 두꺼운 가슴통. 그리고, 면도한 지 한나절쯤 지난 걸로 추정되는 수염의 잔재…… 여자의 턱과 인중, 뺨까지 빼곡한 그 거뭇거뭇한 잔재…… 그녀는 수염 난 여자인가……
"자뷔, 내 남치니…… "
'……!'
그럴 리 없는 일은 이 순간에도 일어났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인 모양이었다. 여자인 줄 알았던 그녀는 여자가 아니었다. 혹 수염 난 여자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럴 리 없었지만, 그녀는 남자였다. 긴 생머리의 남자.
한마디로 거칠었다. 우락부락한 외모의 그에게서 자라났다는 게 신기한, 청초한 머리칼을 도로 양쪽 어깨 위로 늘어뜨리며 에인젤의 남친이 내게 고개 숙였다.
오랜만에 쉬는 날이라는 그. 바이크를 타고 겨울 바다를 보러 가는 길에 에인젤에게 비보를 전해 들은 그는 바로 핸들을 꺾고 달려온 참이었다. 에인젤은 이런 그의 사정을 상주에게 충분히 설명해주었지만, 새빨간 가죽바지가 마음에 걸리는지 살라자는 연신 허벅지를 문질렀다. 문지르는 그의 손놀림을 따라, 꽉 낀 가죽점퍼 위로 드러난 그의 팔뚝에서 알통 두 개가 터질 듯 불끈불끈했다. 그가 자꾸 문지르는 그곳을 나는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었다. 그의 아래에 빈틈없이 달라붙은 새빨간 가죽바지. 그는, 확실히 남자였다. 그가 여자라니, 그럴 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