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초능력 일기 05.
서빈의 자취방은 집주인보다 친구들이 차지하고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오늘도 똑같았다. 집주인은 이불과 한 몸이 된 상태였고, 오랜만에 보는 서수원 녀석이 모니터 앞에 앉아 콘솔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쓸없능. 쓸모없는 초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사는 사회에서 나는 고작 글자 지우기 능력을 갖고 있었다. 서빈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틈틈이 잘 이용해 먹는 모양이지만.
서빈의 방에는 글자 하나를 지워달라는 부탁을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오지 않았다가 서빈의 달팽이나 볼까 하고 왔던 참이었는데, 책상에 놓인 유리케이지 안에는 어느 생명체도 없었다. 또 화단에 산책하라고 놔둔 모양이지.
여어-.
수원이 돌아보지도 않고 인사를 건넸다. 어어–. 비슷한 대답을 던지며 침대에 털썩 기대자 잠에서 덜 깬 생물체가 좀비 같은 신음을 흘렸다. 괜히 무게를 실어 눌러주다 일어나 찬장을 뒤졌다. 라면이나 먹을까 하고.
너 그래서 언제 돈 보내줄 거야?
돈?
냄비에 물을 채우고 불을 올리는데 수원이 말했다. 웬, 돈? 뿅-뿅뿅-. 효과음이 잠시 정적을 채웠다.
너, 우리, 지난준가 지지난준가 놀러 갔다가 그거 봤지.
그거?
빨간 고깔.
고깔?
수원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번달에 애들이랑 같이 드라이브 갔지.
… 그렇지. 갔지.
그랬었나. 끓는 물에 면을 털어 넣으며 기억을 더듬는데 수원이 와—. 하고 긴 숨을 뱉었다. 너 지금 기억 안 난다고 하는 거야? 기억나, 기억나. 차 타고 갔던 덴데. 노을 예쁘고? 대충 얼버무리는데 수원이 어! 하고 답했다. 그렇지, 너 기억나지. 우리 논 보면서 이렇게 저기 빠지면 진흙이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낙엽 다 떨어져서 이제 가을도 끝이라는 이야기도 하고.
길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억이 났다. 노을이 예쁘고, 뒤에서 애들이 노래 부르고, 나는 조수석에 탔던가?
“윤서빈이 운전한 날이잖아.”
“야, 황바운. 근데 왜 아까 기억 안 나는 척했어.”
“기억난다니까? 단풍 보러 가자고 했는데 낙엽 다 떨어져 있고.”
“그렇지. 그리고 다 박살 난 빨간 고깔! 우리 그거 밟고 놀았잖아.”
“어! 맞아. 나 이제 다 기억나. 왜 잊고 있었지? 그거 완전 처박혀있었는데.”
그러게. 왜 잊고 있었지? 차 타고 가다가 빨간 고깔이 신기하게 부서져있어서 애들이랑 누가 더 많이 박살 낼 수 있는지 내기했잖아. 수원이 느물 느물 말했다. 나는 맞아, 그랬지, 아, 재밌었는데, 하고 대답했고.
라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인데 왜 잊어버렸지? 내가 많이 바빴던가.
너 내기 꼴등이잖아. 다시 게임을 재개했는지, 뿅-뿅뿅-하는 소리가 수원의 목소리에 섞인 채 날아들었다.
그거, 뿅, 내기, 뿅, 언제 줄 거냐고. 뿅뿅—.
아…? 하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이불속 존재가 꿈틀거리며 소리를 냈다. 멍청아…, 하고.
“병신아…. 저새끼 능력, 없는 추억 있는 것처럼 말하기야….”
젠장.
<끝.>
photo. 김라면
write. 김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