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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Nov 09. 2023

내가 누나 닮았나?

새벽이다. 신음 소리를 따라 별채로 걸어간다. 푸른 달이 뜬 날이라 주변 사물들이 온통 검은 파란색이다. 별채는 잠겨 있지 않다. 웬일이지. 아빠가 잠그는 걸 깜박 잊다니. 신음이 울음으로 바뀐다. 이를 악물어도 터져 나오는 울음. 울음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안다. 내 친구 임수아다. 빨리 수아에게 가고 싶은데 물속에 있는 것처럼 다리가 느릿느릿 무겁다. 사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미 알고 있다. 수아가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교복이 피에 흠뻑 젖었다. 나는 손에 칼을 들고 있다. 지문이 묻지 않도록 옷소매를 길게 빼서 칼자루를 감싸 쥐고 있다. 칼에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수아가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말한다. "연수... 너는... 너는... 살..." 


강연수는 흐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누나, 울어?"

운전석에 앉은 민경진이 깜짝 놀라 연수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두 사람은 일명 '논현 날다람쥐들'로 불리는 연쇄 강간범들을 잡기 위해 원룸촌 골목에서 이틀 째 잠복 중이었다. 연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스물 중반의 청년 둘이 파란색 오토바이에 같이 타고 필로티 구조의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운전하는 청년은 형광 연두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었고 뒤에 탄 청년은 고려대학교 점퍼를 입고 있었다. 악질 강력범이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연수와 경진은 그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느긋하게 걸어 다가갔다. 

"씨발! 짭새다! 튀어!"

뒤에 타고 있던 청년이 눈치를 채고 외쳤다.

녀석들이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연수가 화살처럼 빠르게 튀어나가 뒤에 탄 청년의 허벅지를 세게 걷어찼다. 경진은 앞을 가로막았다. 오토바이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운전하던 청년이 재빨리 일어나 헬멧을 벗어 경진의 얼굴을 치고 도망쳤다. 연수에게 허벅지를 얻어맞은 청년도 절뚝이며 뒤따라 튀었다. 두 청년은 파쿠르 기술을 이용해 복잡한 원룸촌 골목을 능숙하게 헤집고 다녔다. 파쿠르와 그라피티 관련 유튜버로 나름 유명한 녀석들이었다. 길을 지나던 고등학생 둘이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 카메라로 청년들의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잽싸게 방향을 틀어 애들을 때리고 휴대폰을 빼앗아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다 지친 형광색 운동화가 골목 모퉁이에 숨어 기다리다가 연수에게 벽돌을 휘둘렀다. 연수는 팔로 벽돌을 막고 발차기로 청년의 얼굴을 가격해 기절시켰다. 

"새꺄! 태권도 국가대표 발차기 맛이 어떠냐!"

뒤따라온 경진이 수갑을 채우며 웃었다.

연수는 저만치 도망치고 있는 고려대학교 잠바를 뒤쫓아 달렸다. 녀석은 열려 있던 원룸 건물 입구로 들어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연수에게 바짝 따라 잡히자 크게 당황했다. 건너편 옥상으로 뛰려다 발목을 접질려 실패하고 겨우 난간에 매달렸다.

"누님! 누님!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청년이 불쌍한 얼굴로 애원했다. 연수가 청년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끌어올렸다. 빌빌거리는 척하던 청년은 갑자기 돌변해 주머니에서 꺼낸 주황색 락카스프레이를 연수의 얼굴에 뿌리며 웃어댔다. 

"하하하! 야, 이 XX년아! 너도 나한테 따먹히고 싶지! 이 X년아! 하하하!"

그러나 소용없었다. 연수는 눈을 감고도 발차기로 정확히 청년의 얼굴을 갈겼다. 고꾸라진 청년의 주저앉은 코뼈와 깨진 입술에서 피가 퍽퍽 흘러나왔다. 옥상 문을 열고 들어온 경진이 격하게 숨을 헐떡이며 비틀비틀 걸어와 수갑을 채웠다. 그러고 나서 옥상 바닥에 대자로 누워 무전으로 지원 요청을 했다. 


연수와 경진은 경찰서로 돌아와 강간범들을 유치장에 처넣었다.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던 그들은 소고기 국밥을 주문해 허겁지겁 먹었다. 소파에 누워 자고 있던 팀장 박원호가 코를 킁킁거리다 눈을 가늘게 떴다.

"연수는 얼굴이 왜 당근이 됐냐? 머리는 또 뭐고?"

원호가 일어나 주황색 락카로 범벅이 된 연수의 머리카락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 빌어 처먹을 놈이 누나 얼굴에 락카를 쏴댔어요. 응급실 가서 눈 세척하고 왔는데 피부는 시간 좀 걸린대요."

경진이 국밥을 다 먹고 손으로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는 뱃살 좀 빼자, 자식아. 맨날 연수만 뛰댕기게 하지 말고."

"노력하고 있다구요. 어우, 자기 배는 뭐 잘났나?"

경진이 투덜거렸다.

"에라이! 나이 사십 먹은 형한테 그게 할 소리냐?"

원호가 꿀밤을 먹이려고 손을 뻗었다.

"선규 형이랑 재용이 형은요?"

경진이 재빠르게 원호의 손을 피하며 물었다.

"보석상 털렸다고 신고 들어와서 출동했어."

밥을 다 먹은 연수는 가위를 들고 화장실로 갔다. 거울을 보며 락카가 묻은 머리카락을 대충 잘라냈다. 그리고 담요를 몸에 둘둘 말고 소파에 누웠다. 

"연수야,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 가. 어머니 걱정하신다."

원호가 말했다.

"여기가 편해요. 한숨 잘게요."

연수가 수면안대를 하며 말했다.

원호가 경진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은 연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잠갔다. 


연수의 집 거실 벽과 장식장에는 태권도 선수 시절의 사진, 메달, 트로피, 상장과 상패가 가득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권도를 시작한 연수는 온갖 대회의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남자애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앳된 연수의 얼굴은 그러나 어딘지 어두웠다. 국가대표 시절에도 절대 웃지 않는 선수로 유명했다. 올림픽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때도 무표정이었다. 마당에 나가 된장국에 넣을 파를 뽑아 들어오던 박해자는 딸의 사진 액자에 빨간 무당벌레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자는 손가락으로 사진 속 연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마, 나 배고파."
강연재가 뒤에서 해자를 안으며 말했다. 

"다 큰 애가 징그럽게 왜 이래."
해자가 눈물을 닦고 웃었다.

"누나 대신 내가 애교 담당이잖아."

연재가 해자의 볼에 뽀뽀했다. 그리고 무당벌레를 잡아 마당에 놓아주었다.


저녁을 먹던 해자와 연재는 오랜만에 일찍 집에 돌아온 연수를 보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나!"

연재가 달려가 누나를 껴안았다.

"밥 안 먹었지? 얼른 씻고 와."   

해자와 연재는 연수가 씻고 나오길 기다렸다. 해자는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수학 문제집을 푸는 연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연수가 식탁으로 오자 연재가 일어나 의자를 빼주었다. 

"뭐 먹고 왔어. 밥 조금만 줘."

해자가 국을 다시 끓여 내왔는데, 다리를 살짝 절뚝거렸다. 

"다리 왜 그래?"

연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쳤어."

해자가 연수의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언제?"

"신경 쓰지 마. 다 나았어."

"괜찮은 거 맞아?"

"그렇다니까."     

어디선가 갑자기 빼액 빼액 새소리가 들렸다. 귀청 떨어지게 크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연수가 놀라 둘러보니 거실 창가에 대형 새장이 놓여 있었다. 초록색 앵무새 두 마리가 철창에 달라붙어 소리를 질러댔다.  

"쟤네 뭐야?"

연수가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러니까..."

해자는 안절부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누가 대문 앞에 두고 갔어."

연재가 대신 답했다.

"왜 자꾸 우리 집에 놓고 가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연수가 타박하듯 말했다. 

"불쌍하잖아..."

해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쟤네도 아픈 애들이야?"

연수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닌 거 같아. 사료도 잘 먹고 잘 놀아."

해자 얼굴이 밝아졌다.

"뭐라 하지 마, 누나. 엄마 좋은 일 하는 건데."

"애들 죽을 때마다 몇 달이고 울고불고하니까 그렇지."

"근데 누나, 오늘 어땠어?"

연재가 화제를 돌렸다.

"똑같지. 너는?"

"얘는 공부만 해. 맨날 1등이야. 누굴 닮았는지." 

"아직 고 1인데, 좀 놀기도 해야지."

연수가 말했다.

"공부가 젤 재밌어. 난 그게 노는 거야."

"누나도 공부만 했는데. 태권도 시작하기 전에..." 

해자는 말해놓고 연수 눈치를 살폈다.

연수가 못마땅한 눈길로 해자를 응시했다.

"내가 누나 닮았나?"

연재가 활짝 웃었다.

     

마당 담벼락 아래 스티로폼으로 엉성하게 만든 고양이 집이 있었다. 위에는 살이 나간 고장 난 우산 두 개를 씌워 놓았다. 텃밭 사이로 길고양이 어미와 새끼 4마리가 놀거나 오줌을 싸면서 돌아다녔다. 해자가 그릇에 사료를 가득 채우고 물을 갈아주고 들어갔다. 연수는 평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고양이들이 하는 짓을 구경했다. 잠시 후, 백인성이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케이크 상자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야, 열쇠 뭐야?"

연수가 소리쳤다.

"어머니가 주셨다. 아무 때나 오라고."

화들짝 놀란 인성이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내놔." 

"노노. 며칠 전에 어머니 발목 골절되셨을 때 내가 총알 같이 달려와 병원 모시고 갔거든."

"나한테 전활 했어야지."

"일 방해한다고 하지 말라셨다. 대신 든든한 백기사가 업어드렸지."

"오밤중에 왜 왔어?"

"연재가 좀 보자고 해서 왔거든."

인성이 당황하며 말했다. 

"연재? 꽃은 왜 들고 왔냐?"

연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성의 얼굴이 벌게졌다. 

"연재야! 야! 형 왔다! 야, 인마!"     

인성이 안으로 들어가며 큰소리로 연재를 불렀다.

연수가 담배를 다 피우고 들어가니 인성과 연재가 거실에서 꽃다발과 케이크 상자를 들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형이 직접 줘! 기껏 알려줬더니."

"아, 네가 좀 전해 줘. 얼굴 본 걸로 됐어."

"이래 가지고 언제 손이라도 잡아 보겠어?"     

연수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인성이 연재 손에 억지로 케이크를 쥐어주고 황급히 나갔다. 

"연재야, 형 간다."

꽃다발은 그대로 인성의 손에 있었다.

"형!"

대문까지 인성을 따라 나간 연재가 꽃다발을 받아들고 돌아왔다.

"형이 누나 좋아하는 녹차 케이크 사 왔어."

연재가 케이크를 내밀었다. 

"내일 학교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먹어."

"꽃은?"

"엄마 드려."

연수는 연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연수는 밤새 침대에서 뒤척였다. 협탁 서랍에서 수면제가 든 약통을 꺼냈다. 잠시 망설이다 한 알을 먹었다. 잠시 후, 한 알 더 먹었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겨우 잠이 들었다.  


빗소리가 톡톡 바닥에 피가 떨어지는 소리로 바뀐다. 칼을 들고 별채에서 나와 마당을 걷는다. 집으로 들어가 현관에 가만히 선다. 눈가와 입가가 시커멓게 멍든 해자가 살금살금 거실에 나와 유리잔에 소주를 따라 마신다. 한 잔 더 따라 마시려다가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잔을 떨어뜨린다. 해자는 겁에 질려 안방에서 자고 있는 남편의 눈치를 살핀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확인한 해자가 천천히 다가와 칼을 뺏으려 손을 내민다. “연수야... 왜 그래. 연수야...” 해자가 덜덜 몸을 떨며 말한다.     


"연수야..." 

속삭이는 듯한 해자의 목소리가 저만치서 들려왔다. 

연수는 잠에서 깼다. 해자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연수는 벌떡 일어나 앉아 해자를 거칠게 밀쳤다. 창 밖은 아직 어둡고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또... 악몽... 꿨니?"

해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수는 해자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전화 안 받길래... 너네 팀장이... 살인사건이라고..."

해자가 연수의 휴대폰을 슬그머니 협탁에 놓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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