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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노아 Noah Jang Nov 09. 2023

프롤로그

나 죽고 싶어.


은희가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을 보고 민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남은 커피를 훌쩍 마시고 창가로 걸어갔다. 창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아침 공기에 머리가 맑아졌다. 창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만두었다. 간밤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려 들어오면 편지가 젖을 수도 있었다. 중간쯤 읽었을 때, 주방에서 빵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민우는 편지를 봉투에 넣고 반으로 접어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혜미가 오븐에서 크루아상을 꺼냈다. 그녀는 상아색 실크 잠옷 위에 개나리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몇 주 동안 털실뭉치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뜨개질을 하더니 드디어 카디건을 완성해 입은 모양이었다. 회색과 검정색 금속 소재로 인테리어된 넓은 주방과 대형 가전제품들은 자그마한 체구의 혜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거대한 실험실에 갇힌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얼마 전 민우는 그녀를 위해 집안 전체 인테리어를 바꾸기로 하고 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디자인팀이 한달여 간 수차례 방문해 혜미와 회의를 했다. 공사는 사흘 후 시작이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플로리다주에서 겨울을 보낼 계획이었다.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뉴욕의 겨울은 지긋지긋했다. 키 웨스트에 있는 별장은 오래 전 어머니가 미국으로 쫓겨날 때 아버지에게 받은 이별 선물 중 하나였다. 혜미도 분명 오버시즈 하이웨이 드라이브를 좋아할 것이다.


"어제 한국에서 온 편지, 봤어요? 서재 책상 위에 뒀는데."

혜미가 우유를 컵에 따르며 물었다.

"응."

민우는 짐짓 무심하게 답했다.

"누구?"

"친구."

"손편지 보내주는 친구도 있고, 부럽네요!"

혜미가 방긋 웃으며 수란 크루아상이 담긴 검은 접시와 우유를 민우 앞에 놓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금세 사과 하나를 깎고 먹기 좋게 잘랐다. 민우는 혜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피부의 솜털이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이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였다. 궁색해 보이던 그때보다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2년 전, 민우는 한인이 운영하는 뉴욕 첼시의 한 갤러리 기획전에 초대를 받았다. 아버지 덕분에 뉴욕에 도착한 지 두 달여 만에 저절로 한인 사회의 VIP가 되어 있었다. 인맥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을 해왔지만 전부 무시하고 지냈다. 그날은 날씨가 좋아서 산책하러 나갔다가 별생각 없이 그 갤러리에 방문했다. 티시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막 활동을 시작했다는 젊은 한인 작가가 개인전을 하고 있었다. 전시명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절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였다. 크림색 바탕에 색색의 젤리 같은 형상을 그려 넣은 크고 작은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민우는 수박, 메론, 바나나 등 먹다 남은 과일 조각들이 막걸리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갤러리 대표는 장래 크게 될 작가라며 투자 가치 운운했지만 민우는 미술품  투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손님방의 청록색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그림 두 개면 충분했다. 그럭저럭 적당한 작품 두 점을 구입했다. 


며칠 후 작가가 갤러리 대표를 통해 꼭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무료하게 주말을 보내던 차에 작가가 친구들과 연다는 파티에 가보기로 했다. 작가는 민우보다 두 살 어린 스물다섯의 여자였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처럼 눈꼬리를 길고 진하게 그린 눈화장과 보랏빛이 도는 분홍색 립스틱이 거슬려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술도 음악도 너드한 작업실 분위기도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공간에 배어 있는 희미한 대마초 냄새도 역하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작가는 갤러리 대표의 조카였다. 작가와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웃고 떠들어댔지만 뭐라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벙긋거리는 입술과 누리끼리한 치아만 보였다. 민우는 작가의 앞니 사이에 낀 올리브인지 포도껍질인지 깨알 만한 검은 물질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문득 혐오감이 몰려왔고 집으로 돌아가 혼자 있고 싶었다. 민우가 휑하니 자리를 뜨자 작가가 졸졸 따라왔다. 

"민우님, 어디 가세요?"

"집에 갑니다."

"파티 재미 없으세요?"

"네."

출구로 향하던 그는 파티장 안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일하는 한 여자와 충돌할 뻔했다. 갈색 체크 셔츠에 카키색 면바지를 입은 그녀 옷차림만큼이나 눈빛이 순수했다. 작가의 후배인지 친구인지 고용된 일꾼인지 수 없었다. 

"미안해요!"
여자가 사과했다. 

민우가 사과를 받으려고 서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작가와 친구들이 어느새 몰려와 민우를 둘러쌌다.

"혜미 너 뭐 실수했어?"

작가의 친구 중 한 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 친군데 알바하고 있어요." 

작가가 민우의 귀 가까이 속삭였다. 

"아냐. 난 너 도와주고 싶어서."

혜미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근데 왜 돈을 받아?"
한 친구가 받아쳤다.

"돈이 궁하니까 그렇지."

"누드모델로 일한 적도 있잖아."

"그럴 몸매가 아닌데."

"혜미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해."

작가와 친구들이 깔깔대며 떠들었다.

민우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작가의 그림을 박살 내 쓰레기장에 처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떠나면서 혜미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혜미의 하얀 피부와 허스키한 음성이 은희와 닮았다는 것을 한참 후에 깨달았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봐요?"

혜미가 수줍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 묻었나?"

그녀는 손등으로 입가와 눈가를 문질렀다.

"그냥, 예뻐서."

민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말, 나 안 예쁜 거 알아요."

활짝 웃는 혜미의 양쪽 볼에 보조개가 패였다.

그는 심장을 칼로 후비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은희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은희는 오른쪽 볼에만 보조개가 있었다. 


은희를 놓아야 하는 슬픔이 너무 지독해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 물리적 거리가 고통의 시간을 단축시켜 주리라 기대하고 미국으로 도망쳤지만 오산이었다. 언제라도 달려가 멀리서나마 은희가 사는 집 창문이라도 볼 수 있는 한국에 있을 걸, 낮이고 밤이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했다. 아주 오랫동안 슬픔 말고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바람이 불면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눈이 오면 눈송이처럼 녹아 없어지고 싶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려 머리를 박살 내고 싶었고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쉽사리 죽는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민우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겨냈다. 마침내 은희를 기억 저편으로 보내 빗장을 닫아걸었다.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픔이 무뎌졌고 수면제 없이도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편지 한 통으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혜미에 대한 감정은 거짓이었다. 살기 위해 은희 대신 누군가를 사랑하는 척 자신을 속인 것이다. 혜미에게 너무나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슬퍼 보여요."

혜미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접시에 남은 빵 부스러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생각에 빠져 있던 민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혜미가 고개를 숙여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민우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XX 같은 자식.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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