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장노아 Noah Jang
Nov 11. 2023
하얀 욕조에 사람의 왼쪽 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발목 위 5센티미터 정도에서 절단된 상태였다. 피는 거의 배수구로 흘러내려가 고여 있지 않았다. 노란색 샤워 커튼이 누군가 살짝 들여다본 것처럼 한 뼘 너비로 열려 있고 커튼 안쪽은 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욕실 구석에 검은색 대형 캐리어가 조금 열린 채 세워져 있고 그 위에 하얀 목욕 수건 세 장이 놓여 있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고 깨끗했다. 욕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미끄러지고 허우적거린 흔적과 어수선한 발자국이 보였다. 피 묻은 발자국은 선명했다가 점점 희미해지며 욕실에서 거실을 지나 현관까지 이어졌다.
연수는 욕실에서 현관까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현관 입구에 놓인 매트에 발을 문질러 피를 닦은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더는 피 묻은 발자국이 없었다. 현관문 손잡이에 피 묻은 흔적이 다시 나타났다. 연수는 발자국과 피범벅이 된 현관매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양말을 신고 있었어?”
"신었겠지. 추운데."
경진이 연수의 어깨너머로 매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신발을 신었어."
"뭐래."
"이상하잖아."
"뭐가? 양말?"
"아니."
"신발?"
"그게 아니고..."
연수는 현관에서 거실을 지나 욕실로 이어진 벽을 살펴보았다. 지문이 선명한 피 묻은 손자국이 두 개 있었다. 도망치면서 벽을 짚은 것으로 보였다. 경진이 졸졸 따라오며 말했다.
"얼빠진 놈이 상냥하게도 이런 걸 남겼어. 경찰차 사이렌에 마지막 사체 토막도 처리 못하고 냅다 튄 거지. X 같은 놈."
경진이 최초 출동했던 순경을 손짓해 불렀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복주머니같이 생긴 코를 가진 젊은 순경이 양팔을 몸에 바짝 붙이고 쪼르르 달려왔다.
"논현 1 파출소 김기혁 순경입니다."
순경은 깍듯하게 경례하고 보고를 시작했다.
"02시 15분, 파출소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휴대폰?"
연수가 물었다.
"논현 1가 공중전화를 이용했습니다."
"공중전화라..."
"네. 녹음 틀겠습니다."
30대 정도로 추정되는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화 아파트입니다. 새벽 1신가 302동 105호에서 싸우는 소리와 여자 비명이 들렸는데, 금세 조용해져서 별일 없겠지 했습니다. 새벽 2시쯤, 잠이 안 와서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105호 문에 잠시 귀를 대봤습니다. 혼자 사는 아가씨라 걱정이 돼서.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려서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척했습니다. 검은 마스크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대형 캐리어를 하나 끌고 나왔어요. 꽤 무거워 보였습니다. 혹시 몰라 신고하는 겁니다."
다른 말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바로 출동했습니다. 302동 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구급차가 도착했습니다. 아파트 주민의 신고를 받고 왔다고 했습니다. 벨을 누르고 두드려도 대답이 없기에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니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컴컴하고 욕실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거실 조명을 켜니 핏자국들이 보였습니다. 욕실에 갔더니...”
순경이 거북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잘했어."
경진이 순경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아파트 관리실에 갔던 원호와 재용이 돌아왔다.
"형, CCTV 확인했어?"
경진이 재용에게 물었다.
"재개발 예정 임대 아파트라 관리가 엉망이야."
재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CCTV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새로 달아놔도 누가 자꾸 박살내서 그냥 냅뒀대. 1층이라 엘리베이터 CCTV는 소용없고."
"지문이 선명해서 용의자 특정은 어렵지 않겠어."
정철민 검시관이 다가와 말했다.
“뭐 좀 나왔어요?"
원호가 물었다.
“우선 사체 토막의 신원을 확인해야겠지."
철민이 말했다.
“피해자 신원은?”
연수가 재용에게 물었다.
“이은희. 여. 27세.”
"육안으로 보기엔 여성의 발 같지만 어린 남자애일 가능성도 있어. 절단면이 말려 있는 것과 혈액응고 상태를 봐서는 살아 있을 때 절단된 것으로 보여."
철민이 말했다.
"살아 있을 때요? 이거 완전 미친 새끼네! 어우 씨! 또라이 XXX 새끼! 잡히기만 해 봐라! 어우!"
경진이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아마도 약물에 정신을 잃은 상태였을 거야. 정확한 건 부검해 봐야 알겠지."
"이은희 가족 연락됐어?"
연수가 물었다.
"고아야. 18세까지 부산시 성심보육원이 주소지였어."
재용이 대답했다.
"여기로 이사 온 건?"
"세 달 전."
"그전엔?"
"원룸, 빌라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
"세 달 전이라..."
연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거실과 주방에 오랜 세월 사용한 소박한 가구와 물건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구석구석 먼지 없이 깔끔했다. 침실에는 평범하게 싱글 침대와 옷장과 화장대가 놓여 있었다. 눈에 띄는 건 침실 벽에 걸려 있는 유명 배우 이반의 초대형 사진 액자였다. 침대 옆 협탁에는 갓 스물 정도로 보이는 이반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을 뒤에서 껴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빠와 여동생 같이 친밀한 분위기였다. 데뷔 전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수수했다.
"찐팬이었나봐. 이반은 낼모레 결혼하는데 안타깝네..."
경진이 침실로 들어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반 결혼해?"
"몰랐어? 어떻게 그 빅뉴스를 모를 수 있지?"
"모를 수도 있지."
연수가 협탁 서랍을 열며 말했다.
서랍 안에 일기장 두 권과 사진첩 한 권이 있었다.
"하긴, 누나가 이반을 안다는 게 더 놀랍네."
"TV는 안 봐도 가끔 극장엔 가."
연수는 일기장을 꺼내 몇 장 넘겨 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누나도 이반 팬?"
"사건 현장에서 까불지 말랬지."
연수가 일기장과 사진첩을 증거물 봉투에 담았다.
"어라? 이거 프린트가 아닌 거 같은데?"
경진이 협탁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원본이라는 거야?"
"응. 내가 쓸데없이 사진을 좀 알지. 울 삼촌이 필름 카메라 덕후라."
경진이 액자에서 사진을 빼냈다.
"역시. 필카로 찍어서 인화한 거야."
사진 뒷장에 '은희와 유민'이라고 쓰여 있었다.
"유민? 이반과 닮은 사람인가?"
연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반 같은 미남이 대한민국에 또 있다고? 불가능해. 잠깐..."
경진이 휴대폰을 들고 구글 검색창에 이반이라고 쳤다.
"빙고! 본명 이유민!"
경진이 신나서 말했다.
"그럼, 이은희 일기장 속의 유민 오빠가 이반...?"
연수가 증거물 봉투에서 일기장을 꺼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