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리고 비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오늘도 비가 내린다. 그것도 세차게 내린다. 하늘은 쉼을 모른다. 온 누리가 아주 푹 젖고 있다. 뉴스는 매일 놀라운 물 폭탄 소식을 들려준다. 놀랍다 못해 두렵다. 노아의 홍수는 40일간 내렸다고 했는데 그때도 이랬을까.

집 아래 계곡의 물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 중정 지붕에 떨어지는 물소리 때문에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묻힌다. 비가 오면 막걸리에 파전을 부쳐 먹는 것은 불경한 일이 되어버렸다. 감히 그 낭만을 가질 수가 없다. 1cm도 안 되는 작은 벌레들조차 비를 피하려고 벽을 타고 기어오른다.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고 도로엔 지나다니는 차 한 대 보이지 않는다. 자숙하는 기분이 든다.


연일 내리는 비

작은 애가 기관지 천식으로 많이 아팠다. 입, 퇴원을 반복하며 병원을 들락거렸다. 남편과 나는 오염이 되지 않은 곳에 가서 살라는 의사의 권고대로 북한산 매표소가 보이는 산자락 아래 집을 얻었다. 중심지와 떨어져 약간의 불편은 있었으나 아이의 병이 나아지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 살고 있었다. 큰 계곡이 산 위로 이어져 있었고 집 앞은 계곡 위로 도로를 놓아 반 복개천을 형성하고 있었다. 휴일이면 등산객들이 집 앞을 지나다녔지만 매우 조용한 동네였다.


어느 날 무지막지한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자다가 깨서 불을 켰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왔다는 듯 엄청난 굉음이 들리고 창 밖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옆 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물난리가 났으니 어서 피하라고 했다.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우리는 초를 찾아 집안 여기저기에 두고 덜덜거렸다. 무엇을 해야 하나.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작은 애를 둘러업고 책장으로 가 맨 아래 책들을 빼 가능한 높은 곳으로 옮겼다. 남편이 이 와중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지청구를 주었지만 나는 그게 중요했다. 밖에 나갔다 온 남편이 말했다.

"차가 없어! "

" 차가 없다니? "

차는 늘 대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그 차가 보이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나가보니 마당은 이미 물이 들어와 정강이까지 찼고 대문 앞에 있어야 하는 차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차뿐만 아니라 옆 집의 다른 차들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굉음과 내리는 빗소리 때문에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그야말로 불빛 하나 없는 암흑천지였다.


날이 밝고 비가 그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니 보게 되었다. 지난밤 굉음의 정체는 계곡 위에서 흘러내려온 바위와 돌덩어리들, 엄청난 양의 토사, 뿌리 채 뽑힌 나무들이었다. 복개된 다리 아래 계곡은 없어지고 흙과 돌덩어리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도로보다 더 높이 새로운 지면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뿌리가 하늘로 향한 채 처박혀 있는 나무는 현실이었다. 출근을 하지 못한 남편이 형세를 살핀다고 나갔다 들어와 우리 차를 찾았다고 했다.

따라가 보니 차는 아랫동네 전신주를 들이박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유리창은 하나도 없고 차 안은 흙과 돌로 차 있었는데 세상에, 그 와중에 누군가 차의 오디오를 뜯어가고 없었다.

우리는 수재민이 되어 구호물자를 받았다.


지나 간 일은 그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발전과 퇴보를 반복한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우리 삶은 늘 되풀이된다. 융합과 변형을 이루어내면서 또 다른 국면에 우리를 마주 서게 한다. 전원주택의 수요가 늘면서 동네엔 늘 집을 짓는 소리가 난다. 요즘엔

도저히 지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 집을 짓는다. 그러려면 산을 깎고 아름드리나무들을 거침없이 베어내어야 한다. 비가 오면 맑은 물이 흐르던 집 아래 도로와 계곡은 뻘건 토사로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다시 덜덜거린다.

우리는 진정 자연에 대한 경외를 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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