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오랜만의 산책이다.


벌써 누군가 밤을 털어갔다. 길섶에 빈 밤송이가 뒹굴고 있다. 도로변 벚나무들도 눈에 띄게 물들고 있고 문득문득 초록 풀숲에 빨간 나뭇잎들이 숨어있다. 단풍나무는 이미 붉어졌고 바람이 가지를 흔들면 도토리가 떨어진다. 일찍 익은 산밤은 벌어진 채 엄지손톱만 한 것들을 숲길에 흘리고 있다. 강아지풀은 수많은 씨를 달고 바싹 말라가며 지나는 행인의 바지단에 스쳐 우수수 떨어진다. 더욱 빨갛게 꽃 피우는 맨드라미, 찧어서 물에 타면 고기를 기절시켜 잡을 수 있고 염색제로도 쓰이는 진분홍 여뀌가 낮은 곳마다 그득하다. 봄철에 향이 강한 쥐똥나무는 가지에 붙은 잎 줄기마다 열매를 달고 있고 찔레꽃은 블루베리와 같은 빛깔로 열매가 익고 있다. 토종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등골나무도 분홍색을 띠는 묘한 꽃을 달고 있다. 뿌리에서 먼 잎부터 색이 변하고 있다. 분홍색 코스모스가 한 무리 피어 있다.


숲의 생명들은 봄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다. 조용히 시간에 순응하며 생존하지만 호소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저벅거리고 부스럭거리며 헉헉대는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충만하게 하는 건 서늘한 바람과 전나무 몸통에 비스듬히 무늬를 그리는 햇살과 축축한 숲의 향,그리고 이제는 물들어 가는 저 초록이다.


산책에서 만난 식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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