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교회 예배당에 들어섰을 땐 이미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 반주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예배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빈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입구에서 안내하는 분의 인도를 받아서 빈자리를 찾았다. 옆자리에는 여자 것으로 보이는 작은 손가방이 놓여있었다. 자리를 잠시 비운 모양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그녀의 옆자리였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찬양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예배당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직감했다. 그의 옆자리가 그녀의 빈자리였다는 것을... 왜냐 순간 그녀와 스치듯 마주친 눈빛에서 미세하지만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과 어색한 표정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다. 그의 심장은 평소와 다른 리듬으로 뛰기 시작했다.
만약 그날 서로의 감정을 서둘러 확정하고 확인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어색한 관계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전 ##씨가 여자로 느껴져서 그런 거예요.]
....
[전 그냥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냥 편한 오빠동생 사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고마워요. 전 그걸 빨리 알고 싶었어요. 피차 감정소모는 불필요하니까 서로에 대한 감정이 이성에 대한 거냐 인간에 대한 거냐는 저에겐 완전히 다른 거 거든요.]
그는 우유부단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의도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러자 바로바로 오던 그녀의 메시지 회신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날아든 답장이었다. 그녀는 메시지의 시간차만큼 고민의 시간을 가졌던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형님!”
그녀는 아마 처음부터 그를 남자로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교회에서 그와 마주치면 남자들 사이에서 부르는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처음에 그는 그런 호칭이 별다른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궁금해서 찾아본 여자의 이성에 관한 심리 유튜브를 보고 난 후 여자가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남성에게 간혹 이런 식으로 남성을 호칭한다는 영상을 보고 좌절감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그를 그저 한 인간으로서, 손윗사람으로서의 호감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여자로서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감정을 확인한 이후, 서로의 시선은 예전처럼 설렘과 호기심이 아닌 어색함과 난처함으로 변해 있었다. 목적을 가진 만남은 그 목적의 달성 가능성이 사라지면 만남을 가질 이유도 함께 사라진다.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들처럼 목적 없이 함께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진정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로는 서로에게서 다른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서로는 서로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놈이지만 한 순간에 숨겨둔 감정을 모두 토해내 버린 후엔 그것들을 주워 담을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겉으론 관계의 발전을 위해 진심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때론 진심을 숨기고 관계를 먼저 발전시켜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모순이다. 감정이 깊어지고 난 뒤 알게된 상대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이미 깊어진 감정을 돌이킬 수 없어 그것들을 끌어 안기도 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인 것 처럼 행동하지만 지극히 감정적임을 숨기기 위한 도구로 이성을 이용할 뿐이다.
그는 관계를 정의하고 만나고자 했고 그녀는 만나면서 관계를 정의해 가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남성으로서의 호감을 원했고 그녀는 인간적인 호감을 원했다.어쩌면 그녀가 더 순수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다가가는 것은 순수한 호기심과 관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다. 하지만 성욕이란 욕망을 지닌 성인이 되면 남자와 여자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가 그녀에게 고백을 하기 전까지는 짝사랑이었지만 이젠 외사랑이 되었다. 상대에게 진심을 들키지 않고 모르게 하는 짝사랑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설렘과 기대을 가져오지만 거절당한 진심은 쉽게 지워지지 못하는 외사랑의 상처가 되어 서서히 곪아간다. 사랑하면 행복해야 하지만 사랑할수록 괴로울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미움을 품고 있다. 애증이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알아버렸기에 그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그의 시선을 피했고 그는 그녀와 마주치면 아물어가는 상처가 덧날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상처에 딱지가 앉으면 계속 뜯어내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계속 샘솟지 않은가. 부드러운 피부에 오돌토돌하게 솟아난 딱지는 계속 신경에 거슬리며 집착하게 된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감정에 충실함은 결국 상처를 더욱 오래 가게 만든다. 딱지를 떼어내고 속이 아물지 않아 피가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면 이내 후회가 밀려오지만 그래도 계속 뜯고 싶다. 보고 싶은 감정을 속일 수 없다. 어른이 되면 이렇게 감정을 속이며 살아가는데 익숙해진다. 어린아이처럼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어른의 마음속은 온통 모순으로 가득 차 버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회화라고 말한다. 좋다고 다 할 수 없고 싫다고 다 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남녀 간에 생긴 감정이 연인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생기는 현상은 서로를 의도적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서로를 알고 싶어 끌어당기고 있었다면 이제는 알아버렸고 연결될 수 없음을 확인했기에 밀어낼 수밖에 없다. 서로를 끌어당길 합당한 명분과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남녀는 그렇게 점점 멀어진다.
누구나 우연으로 만나 인연이 되어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누군가는 우연에서 또 누군가는 인연에서 그 관계가 멈춰버린다. 하지만 관계는 정체될 수 없다.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특히 남녀 간은 관계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남녀 간에 지속되는 우정을 믿지 않는다. 이 감정이란 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싹이 트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사랑 또한 그렇다. 사랑의 씨앗이 싹이 트고 꽃을 피우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면 썩어 없어지게 마련이다. 성장을 멈춘 사랑은 썩어 들어가는 고통으로 변질된다.
찬양이 끝났다.
목사의 축도를 따라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이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그때였다. 옆자리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찬양을 끝낸 그녀가 옆자리에 앉았음이 느껴졌다. 미세한 사람의 온기와 향기 없는 그녀만의 향기가 스며든다.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였을까 모든 신경 세포가 귀와 코와 피부로 옮겨간 듯하다. 미세한 그녀의 움직임과 숨소리까지도 느껴진다. 시각을 잃은 장애인이 왜 다른 감각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기도가 끝이 나고 눈을 떴을 때 옆에 앉은 그녀가 보였다. 굳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진 않았다. 다행히 신은 인간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180~210도까지의 시야를 주셨다. 그녀와 이렇게 가까이 앉아본 것이 처음이다. 어색하다. 그녀 또한 어색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그녀의 갈 곳을 잃은 손은 앞에 놓인 태블릿과 핸드폰을 번갈아 가며 만지작 거린다. 그녀는 얼리어덥터이다. 그녀 앞에 놓인 각종 최신 스마트기기들이 그의 앞에 달랑 놓여있는 두툼한 성경책과 대조적이다. 어색함은 의미 없는 행동을 유발하는 법이다. 의미 없음이란 그 어떤 목적의식 없이 하는 행동이다. 신기한 것은 이 의미 없는 행동들 속에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심리학이란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관심이 많았다. 여기저기 주워본 심리학 지식들로 추측컨데 지금 서로의 심리 상태는 지극히 안정적이지 않다. 그녀의 손은 다시 머리로 옮겨가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어색한 두 남녀의 어색한 행동이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그는 조금씩 안정이 찾아들고 있었다. 계속 뛸 줄만 알았던 심장은 점점 평상시의 리듬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긴장감은 잦아들고 편안함과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기운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진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과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아녔을까 예배시간 내내 부자연스러운 손동작과 움직임이 이어졌다. 내 맘과 같지 않은 상대방의 마음 때문에 사랑은 항상 오해와 갈등을 불러온다.
사랑은 주는 자보다 받은 자가 더 불편한 것일까? 주고 나면 미련이 없지만 받았는데 돌려줄 수 없는 사랑은 계속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계속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외사랑은 둘 다가 괴롭다. 하나는 사랑을 줄 수 없어 괴롭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받을 수 없어 괴롭다. 사랑은 생겨났는데 사랑이 갈 곳을 잃어버렸다. 정지된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랑의 대상들에게는 고통으로 변한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시련의 상처는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잊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고통은 시야에 들어오는 이미지 함께 계속 되살아난다. 마치 우리가 과거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그때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래서 사랑이 이뤄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떠나야 하는 것이다. 같은 공간 속에 머무는 것이 서로에게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같은 공간 속에서 머무는 남녀의 사랑은 시작도 어렵고 끝맺음도 어렵다. 그래서일까 사랑과 삶이 분리되는 남녀들이 늘어간다. 삶 속에서 사랑을 찾아야 하지만 사랑과 삶 두 가지를 잃기가 두려워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인간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에 더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모두가 자기 것을 지키려 보수적이 되어간다. 사랑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부터 시작이지만 우리는 나의 문은 닫고 상대의 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서로가 그러하니 사랑은 갈수록 어렵다.
짝사랑은 실현될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기에 이상적이다. 하지만 외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절망을 품고 있기에 현실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판타지를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