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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Nov 05. 2024

자스민차와 패딩 조끼 - 女

아내의 章

5월이 되었다.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끼기에 좀 아쉬운 쌀쌀한 날씨였다. 조금 가벼운 옷차림이 걱정되었지만, 자동차로 강릉을 가는 여정이라서 그렇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의 차에 타는 일도 익숙해져 갔고, 차 안에서의 대화도 자연스러웠고 편했다.    

  

“강릉까지 운전 힘드시면, 중간에 제가 하겠습니다.”     


강릉은 차로 3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그에게 독박 운전을 맡기는 게 미안했다.     


“아닙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차를 준비했으니 드세요. 오늘 날씨가 좀 으스스합니다.”     


그와 나 사이에 이쁜 보온병이 하나 있었다

.      

“아, 네. 무슨 차에요?”

“네, 쟈스민 차에요.”    

 

준비에 진심인 남자. 요즘 유행하는 표현이지만, 그는 ‘준진남’이었다. 작은 것에 감동한다는 게 이런 걸까? 그의 자상함과 배려심에 살짝 가슴이 뛰었다. 보온병을 여니, 따뜻한 김이 올라왔다. 보온병 뚜껑에 조심스레 쟈스민 차를 따라, 그의 운전 속도에 맞춰 한모금 한모금씩 음미했다. 아침에 살짝 칼칼했던 목구멍이 따뜻한 습기를 머금더니, 금새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식사도 하고, 유명한 커피가게에도 들렀다. 도시재생이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명주동 골목을 구경하기 위해서 인근에 주차를 하고 막 걸어가기 시작할 무렵,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주차장으로 가야할 지 망설이고 있는데, 떨어지는 비를 무시하기에는 점점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여기 계세요. 우산 가져올게요”     


그는 주차장으로 달려가더니, 약 5분 뒤에 나타났다. 우산 하나와 남성용으로 보이는 패딩 조끼를 가져왔다.     

“여기 이 조끼를 입는 게 좋겠어요. 제거라서 사이즈가 크니 그 겉옷 위에 그냥 걸치시죠”

“아니, XX씨가 입으셔야죠. 입으시려고 가져오신 거 같은데. ”

“아니에요. 날씨가 오늘 좀 추워진다고 해서, OO씨가 필요할 수도 있을 거 같아, 일부러 가져온 거에요.” 

    

그의 조끼를 내 겉옷 위에 걸치고, 비가 내리는 명주동 골목을 우산 하나를 나란히 함께 쓰고 다녔다. 그의 배려와 자상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꽤 미로처럼 만들어진 골목 여기저기를 재미있게 구경했다. 더욱 굵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우리는 주차장으로 돌아왔고, 차에 오르자마자,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갑자기 그가 음악을 틀었다. 일본 록밴드 ‘안전지대’의 “Friend”.     


“제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에요. 대학 때 그리고 20대 때.”

     

일본 록 밴드였다. 나는 일본 음악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들어본 적도, 불러 본 적도, 여튼 즐겨본 적이 별로 없다. 내가 20대에 즐기던 일본문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당시 일본 록밴드의 음악보다 그들의 외양, 즉 화장하고 장식이 많은 의상, 이런 것들이 오히려 비호감으로 다가와서, 음악 또한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나와 참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참 다른 문화 속에서 성장했고 세상을 알아 왔다는 생각. 어쩌면 그때 그 시절 우리가 만났다면 서로 너무 달라서 호감을 갖지 못했을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일본 음악을 좋아하는 남자는 내가 그때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순수하기도 했지만, 또 그런 편견들이 만들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밴드는 Off Course에요. ‘사요나라’라는 곡이죠”   

  

그는 마치 신난 듯이, 내가 처음 듣는 일본 밴드들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음악은 항상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고, 그 시절의 삶을 느끼게도 해 준다. 음악과 함께 그의 이야기도 계속되었는데, 나는 점점 빠져들었다.   

  

나이 들어 가면서, 젊은 시절 만들어진 그 편견들과 판단, 기준들이 너무나도 좁았다는 생각들이 생겨났었다. 그를 지금 만나서 참 다행이었다. 음악을 듣는 내내 그의 젊은 시절의 고민과 방황과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나에게 오롯이 전달되었고,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을 비로소 이해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앞 창의 와이퍼가 무색할 정도로 비가 몰아쳤다.    


“우리, 잠깐 휴게소에서 쉬었다 갈까요?

 ”네. 그러시죠.”     


화장실을 다녀왔지만 아직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휴게소 푸드 코트 앞에 메뉴를 보면서 서로 무얼 먹는 게 좋을지 의견을 나눴다. 

    

“머 드실래요?

”아, 라면? 아니 김밥? ” 

“그럼 라면과 김밥 하나씩 시켜서, 같이 조금씩 나눠 먹죠.”

“아니. 드시고 싶으신 게 있을텐데요. 다른 거 드셔도 돼요.”

“아네요. 저도 그거 먹고 싶네요. 주문하죠.”  

   

휴게소 2층 창가 앞에 자리했다. 나란히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라면과 김밥을 먹었다. 멋진 식당을 예약해서 요리 음식을 먹는 일보다, 소소하게 분식을 나눠 먹는 우리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다시 차에 오르고, 그는 또 새로운 일본 밴드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우리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 침묵의 시간이 서로에게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우리는 늘 그런 일상을 보내듯이 그 시간을 흘려보냈다     


비구름이 걷히는 저 너머의 하늘에서, 우리 인연의 강렬함의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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