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존댓말과 반말은 묘한 구석이 있다. 존댓말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기는 한데, 어느 선 이상 가까워지질 않고, 반말은 서로에게 막 대하는 것이긴 한데, 친밀감은 더 깊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친구나 연인 사이에도 어느 정도 선이 넘어야 서로 편하게 말을 놓게 되고, 다시 좀 더 친밀해지는 것 같다.
가장 이상적인 반말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예의를 지키는 친밀한 반말일 것이다.
그녀는 88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나보다 2년 아래였고, 나이는 1살 차이였다. 내가 학교에 일찍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2018년도 4월 초였으니까, 나는 만으로 오십을 갓 넘겼고, 그녀는 아직 앞자리에 4라는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은 젊을 때보다는 넓어져 있기는 했지만, 남녀 사이에 관계를 맺는 것은 오히려 좁아져 있었다. 나름 산전수전 겪다 보니, 여성을 보는 관점이 젊은 시절과는 꽤 차이가 났다. 이성을 만날 때, 이성적인 끌림도 중요하고 경제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잘 맞을 것 같은 이성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원하는 것과 현실은 늘 다르게 작용한다.
어린 시절의 연애는 나름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젊은 날의 색정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서툴지만 무분별한 직진의 연애가 된다. 그래서 오히려 젊음 시절의 연애는 아름답다. 그렇다고 나이든 사람의 연애가 더 훌륭한 것은 아니다. 나이든 사람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게 되면, 세련된 듯 서툴고, 분별이 있는 듯 없기도 하고, 돌아가는 듯 직진이 되기도 한다. 인연 앞에서는 이성은 작동하지 않고 엉망진창이 된다. 나이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 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연애 초기만 느낄 수 있는 ‘설렘’ 때문일 것이다.
강릉을 다녀온 주말에 인사동에서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좀 더 친해져 있었지만, 아직 서로 말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인사동에서 만나 북촌을 구경하기로 했다. 남녀 간 연애의 큰 장점 중의 하나는 혼자서 가긴 좀 뻘쭘한 곳을 연애라는 핑계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혼자서 이런 곳을 구경하러 다니는 것도 청승맞은 느낌이었고, 그렇다고 동성인 친구들과 그런 장소를 가는 것은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북촌도 많이 변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혼자일 때는 굳이 찾아가서 볼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의 안내에 따라 북촌의 골목을 여기저기 구경하고 나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녀가 아는 식당이 인사동에 있다고 해서, 인사동으로 돌아와 된장찌개가 맛있다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된장찌개가 맛있어요. 회사 다닐 때, 종로에 나오면 자주 오던 집이에요.”
“아! 전 이런 집이 좋아요. 반찬이 정갈하고, 된장이 맛있는 집이요.”
“흐흐, 반찬이 나오면, 다 넣고 비벼 드셔도 좋아요.”
그런 얘기를 듣다가 문득 내가 말했다.
“근데, 우리 이제 말 편하게 할까요?”
“흐흐, 네, 좋아요. 사실 좀 그랬어요.”
우리는 그렇게 말을 놓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말을 놓기로 했지만, 말을 금방 놓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서로의 존댓말에 익숙해져서 막상 말을 놓으려니 그 또한 어색했다. 그 순간, 식사가 나왔고, 약간의 어색함을 희석해 주었다.
“여기 반찬 어때? 정갈하지? 조미료를 쓰지 않은 맛이야.”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놨다.
“응 그러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산에 있을 땐 주로 이렇게 먹었지. 그래서 늘 배고팠었어.”
나도 그렇게 어색하게 말을 놓았다. 어색함 속에서 약간은 들뜨는 느낌이 있었고, 머릿속은 반말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아마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식사를 끝낼 즈음엔 우리 둘은 서로 말을 놓는 것이 꽤 적응되었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인사동길을 따라 종로 쪽으로 걸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가로등이 켜지면서 어둑해진 거리에 빛이 스며들었다. 그 길을 따라 여느 때처럼 걸어가는데, 내 오른쪽에서 걷던 그녀가 그녀의 왼손으로 내 오른팔에 자연스럽지만 갑작스럽게 팔짱을 꼈다. 짧은 순간, 약간 놀랐지만 설렘과 함께 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크, 내가 너무 진도를 빼지 않았나?’
‘이 친구, 좀 당돌하네.'
‘먼저 스킨쉽을 하게 하다니, 미안하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왼손으로 팔짱낀 그녀의 왼손을 내리고 내 오른손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을 그렇게 잡고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엔 수줍은 듯한 미소가 엷게 피어올라 있었다. 손의 촉감과 체온을 느낀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그녀와의 간격이 순식간에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의 ‘첫 손’을 각자 감상이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걸어가다가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도 나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빛은 나처럼 충분히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그렇게 계속 손을 잡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