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章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그녀와 만난 지도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절은 초봄에서 초여름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옷차림은 가벼워졌고, 태양의 한 낮보다는 아침저녁의 선선함이 더 좋은 시절이었다.
빠른 듯 느린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고, 때로는 감지할 수 없는 우리의 속도를 돌아보며, 우리는 서로, 인연에 후회 없는 지점을 지나가고 있었다. 서로에게 즐거웠고, 서로에게 살가워졌다.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그녀가 차지한 자리는 견고해지고 있었다.
우리를 만나게 해준 사촌 여동생과 매제를 만나기로 했다. 우리의 만남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고, 그들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알리고 싶었다. 종로의 어느 술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술집은 우리에게 익숙한 잿빛 같은 장소였다. 오랜 부잣집에 놀러 간 듯한 오래된 화려함이, 적절한 익숙함을 넘어, 색을 잃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잃어버린 시절을 다시 기억하게 해주는 친절함이 있는 가게였다.
사촌 커플의 덕담과 우리의 부끄러운 듯 뿌듯한 감정이 섞이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촌 여동생이 말을 꺼냈다.
“둘이 잘돼서 너무 좋다. 그날 둘의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어. 암튼 보기 좋네. 그건 그렇고, 우리는 다음 주에 진도에 놀러 가려고 해. 오빠도 같이 가.”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언니. 여행 같이 가는 거 어때요? 우리 둘이 가는 거보다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러자, 잠시의 틈도 없이 그녀가 말했다.
“너무 재미있을 거 같아요. 가요! 여행! 흐흐.”
그리곤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여행 가는 거 하고 싶었어. 괜찮지?”
이렇게 결정지으며 나에게 의견을 구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해맑은 기대와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커플끼리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표정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오래된 부부였다. 커플끼리 놀러 가서 남자는 남자끼리 자고, 여자는 여자끼리 자는 그런 어린 시절의 우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성인을 넘어서 중년이었고, 중년의 삶이 갖는 방식은 이와 다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런 방식의 여행에 대한 염두를 전혀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 한 켠에서 일어나는 이런 생각을 묻어둔 채, 나는 곧 그녀에게 동화되어 갔다. 그녀의 즐거움을 같이 느끼고 싶었고, 그녀의 기대를 채워주고 싶었다.
“응. 그래. 가자.”
그녀는 여행을 처음 가보는 소녀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나는 곧 ‘그래. 이건 이대로 좋은 거네.’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티 없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행 날이 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매제의 차로 진도로 내려가는 길에 우리는 8090의 음악을 들으며 우리의 젊음을 추억했다. 나오는 한 곡 한 곡마다 각자의 추억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같은 추억으로 즐거웠고, 개인적인 기억으로 아련했다.
어느새 진도에 도착하니, 매제의 지인이 마중 나와 있었다. 젊은 시절에 서울에서 알던 후배인데, 이제는 지역에서 성공한, 꽤 알아주는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지인의 안내로 ‘세방낙조’라는 곳으로 가서 저녁노을을 보았다. 노을은 언제나 세월을 느끼게 한다. 하루가 끝나는 태양의 흔적일 뿐인데, 노을은 언제나 세월의 아련함을 느끼게 한다. 화려했으며 아름다운 노을은 잠깐의 처절한 광휘를 뿌린 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노을은 그렇게 기억하지 못하는 미래를 보여주며 사라져 갔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갔다. 숙소는 매제의 지인이 가지고 있는 손님용 집으로 마을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잘 사용하지 않은 듯한, 갓 피어난 곰팡내가 살짝 느껴졌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단층 양옥의 숙소였다. 전복 양식업을 하는 지인은 두 박스나 되는 전복을 가져왔다. 저녁도 맛있게 대접받았는데, 아무리 전복 양식을 한다고 해도 두 박스나 되는 전복을 가져온 것이다. 그리곤 우리가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그는 편안하게 쉬라며 돌아갔다. 전복은 크고 실했다. 우리는 전복을 쪄서도 먹고 구워도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전복의 양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우린 가벼운 술과 함께 즐겁게 전복을 먹었다. 언제 이렇게 전복만으로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단 말인가! 흔하지 않은 기회였고, 그 지인에게 감사한 일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씻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사촌 여동생이 말했다.
“우린 부부니까 같이 잘 거야. 오빠는 언니랑 같은 방 써요.”
그런데 오히려 당황한 것은 매제였다.
“아니,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그 와중에 매제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마도 사촌 여동생은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매제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지르기 위해 여행 내내 이 말을 할 순간을 준비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 그녀 또한 당황했다. 여행을 하면서 잠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했겠지만, 이렇게 기습적이고 공개적으로 합방을 권유받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전 그냥 OO씨(사촌 여동생)랑 같이 방을 쓴다고 생각했어요.”
“언니! 우리가 뭐 애들도 아니고, 뭐 어때요?”
“......”
“오빠. 오빠도 괜찮지?”
우리나라 K-아줌마의 파워는 대단했다. 생각할 여지도 없이 밀어붙이는 힘에 우리 셋은 꼼짝하지 못하고 동생의 말을 따라야 했다. 나는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그리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럴게.”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그렇게 해요. 괜찮아요.”
아직도 어색해하는 매제를 뒤로한 채 우리는 우리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