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선택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의 전형을 보여주듯, 17년 전 건축 관련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종이 위에 낙서하듯 그린 도면을 가지고 일꾼을 고용하고 직접 진두지휘해서 전원주택을 지었었다. 기초공사, 구조물 시공, 전기공사, 인테리어 등을 나누어 시공을 하였다. 건축 문외한이 처음 지었던 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성 들여 가꾼 보람이 있어 나름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미를 살린 집이 되었다. 하지만, 실내 인테리어와 공간 활용 측면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했었다.
"만일 한 번 더 집을 지으면 정말 잘 지을 수 있을 거다"라는 생각은 집을 짓고 사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래도 오랫동안 풍기의 야경과 병풍처럼 둘러선 소백산을 마주 보며 만족한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축복받은 기간이었다.
전원주택에 산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집주인이 아니라 일꾼이나 집의 노예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쉴 틈 없이 풀과 잔디와 나무를 상대로 씨름해야 하고, 꾸준히 집을 손봐야 한다. 휴가철이나 연휴 혹은 주말이면 많은 지인들의 피서지가 되기도 하고 별장이 되기도 한다. 마치 그들을 위한 문지기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구동성으로 "부럽다, 이런 전원주택에서 살면 힐링이 되겠다."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한마디씩 내뱉지만 그래도 그 말 한마디 듣는 것은 내게 작은 만족감을 주곤 했었다. 어쩌면 그런 말을 들으려고 집을 더 열심히 가꾸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은 집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집을 짓고 10년 이상 살다 보니 처음 못 질 하나 변변히 못하던 내가 어느 사이 미장일과 목수일은 물론 조경과 꽃과 나무 가꾸는 일까지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고 잘 해낸 걸 보면 내 적성에 꼭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발견하는데 40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다시 집을 지을 기회가 주어지면 정말 잘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이 모두 해외로 이주해야 해서 애틋한 마음을 뒤로하고 어쩔 수 없이 나의 분신과도 같았던 집을 처분했지만, 세월이 빠르게 지나다 보니 다시 한국에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 땅을 마련하고 생에 두 번째 집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번은 목조에 황토를 이용하여 건강을 테마로 한 집을 지었지만, 이번에는 집의 역할 변화에 대한 미래의 트렌드를 담아 거주의 목적뿐 아니라 일과 휴식, 치유의 기능을 제공하는 다용도의 기능성 주거공간을 구현하고 싶은 욕심이다. 이번에는 초기 단계부터 건축과 동료 교수의 도움을 얻어 내 머릿속에 그린 집의 형상을 제대로 설계하기 시작했다.
뼈대를 철골로 만들고 벽과 지붕 등은 친환경소재를 수배해서 쓸 예정이다. 물론 태양열을 충분히 활용해서 지붕 한 면은 태양전지로 공사할 생각이다. 채광을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오픈된 유리시공을 가미하면 좋을 것이다.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주거공간과 업무공간을 분리해서 주거공간은 2층 업무공간은 1층으로 건축하고 주거공간 1층은 식당과 응접실로 업무공간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어 미팅룸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외부 침입에 대한 안전성 확보를 위해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구글 홈을 통해 24시간 휴대폰과 연동되고 감시 영상은 클라우드에 안전하게 보관되며 가능한 많은 것들을 자동화시킬 생각이다. 그동안 연구해온 감성조명장치를 통해 내외부 조명의 칼러와 밝기는 계절과 기후에 맞도록 자동 세팅되며, 출입구, 커튼을 포함한 보일러, 취사기구 등도 원격제어가 가능하도록 시공할 생각이다.
요즘은 모듈러 주택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의 건축방식들이 개발되어 기간과 비용, 원하는 형태의 디자인 측면에서 훨씬 경제적으로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 대신 직접 집을 설계하고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은 후회를 동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올바른 선택들이 모여져야 좋은 집을 짓게 될 테니 말이다.
건축구조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설계자에게 맡긴다 해도, 단지 설계단계에서 집의 전체적인 콘셉트와 재료, 인테리어 등에서 만족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마치 광활한 미로에서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 1층이 내려 보이는 복층구조를 좋아하다 보니 2층 연결통로에 서면 1층이 내려 보이도록 설계에 반영했다. 동시에 연결통로 위로 하늘 전망창을 두어 낮에는 채광으로 밝고 따듯할 뿐 아니라 저녁에는 별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모든 조명장치는 빌트인으로 벽에서 돌출되지 않도록 시공할 것이고, 사무실과 주거동 사이의 연결통로는 바비큐 장소로 활용하는 공간을 두었다. 사무동 지붕은 평편하게 시공하고 주거동 2층에서 바로 연결되어 운동과 함께 일광욕을 즐길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한다. 2층 벽면은 모두 수납공간으로 마무리할 생각이다. 손님이 오면 사무동에 침대를 설치해서 게스트룸으로 활용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그래서 주거동에 방이 2개면 족하다.
두 번째 집을 짓는다면 처음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비, 편리성 등 모든 측면에서 만족할 만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막상 설계 단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집을 허물고 다시 짓기를 계속하고 있다. 처음의 호기와 달리 집 짓기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걱정거리가 많아진다. 처음 집을 지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무게감이 더욱 커져만 간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선택의 고심이 깊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바둑이나 장기에서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이 있듯이 너무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후대에 남을 예술적인 건축을 할 것이 아니고 내가 편히 쉬고 일할 수 있는 그런 집을 지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마음도 정리하고, 설계가 마무리되었는데...
마음속 어딘가에서 또 다른 선택의 길과 마주한다.
아무리 경관이 좋다고 한들 퇴직 후 과연,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는 것이 답일까?
병원 가깝고, 쇼핑몰이 있는 불빛 도시 속 편리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