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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우주 Apr 13. 2020

개를 키우고 싶은 마음(3)

저는 개를 키우고 싶지 않은데요 30

나는 개를 키우고 싶지 않다. 반어적인 표현이 아니다.

나는 개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동물과도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혁구를 만난 이후로 다양한 반려동물의 삶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떠한 일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많은 반려동물들이 보호자의 끊임없는 노력과 마음으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반려동물의 ‘집사’를 자처하며 반려동물을 정성스럽게 돌본다. 존재만으로 한없이 고마워하며 아낌없이 많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나만 없어, 다른 사람들은 고양이 다 있고 나만 없어’라는 요샛말처럼, 반려동물이 없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의 반려동물을 통해 위로를 얻는 듯 그들을 귀여워하고 궁금해한다. 반려동물을 향한 그 마음이 때로는 너무나 애틋해서 그저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사무칠 정도다.


나는 혁구에 대한 나의 ‘마음’이 그들과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혁구가 자유견이었던 시절, 나는 혁구가 무탈하게 살아있는지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한동안 눈에 띄지 않으면 혹시나 마주칠까 싶어 주위를 빙빙 돌았고, 그러다 혁구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휴일에는 물과 사료가 떨어질까 봐 귀찮음을 이겨내고 일부러 혁신파크까지 나가 보곤 했다. 이후에는 혁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과 혁구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급했다. 어찌나 불안하고 신경이 쓰였는지 내 생애 가장 심한 위경련으로 병원신세까지 졌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혁구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혁구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곧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곧 맨 처음 ‘혁구를 데리고 오겠다’고 앞장선 자로서의 책임과 인간으로서의 도리 같은 것으로 채워졌다. 내 기준에서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드는 마음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혁구와 보내는 시간은 즐겁지만 마냥 함께하고 싶은 간절함은 없었고, 혁구가 안전한 곳에 있다는 걸 알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혁구가 테라피독 교육을 받으며 한동안 자리를 비웠을 때에도 허전하긴 했지만 엄청나게 보고 싶거나 그립지는 않았다. 훗날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확률이 높은) 혁구의 마지막 날을 떠올려봐도, 그것 또한 녀석의 삶이라는 덤덤한 생각이 앞선다. 혁구와 교감하는 시간이 부족해서일까? 무엇이든 굳이 정을 붙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 탓일까? 나도 모르게 혁구가 나와 ‘다른 존재’라고 마음의 벽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무엇일까? 그 사랑의 모양은 너무나 다양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햇볕 하나 안 드는 담벼락 사이에 개를 묶어 놓는 사람도, 잃어버린 개를 찾고서 ‘야, 이년아. 어디를 나간 거야.’하며 거칠게 끌고 가는 사람도, ... 모두 동물을 사랑한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사람이 먹는 음식 한 입을 먹이는 것도 사랑이다. 외래종을 어렵게 들여오고 달라진 환경을 맞춰 주며 까다로운 사육 방법을 익히는 것도 모두 동물을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강아지 번식장이나 펫숍 또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일터다. 그 사랑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까? 그 사랑은 틀린 것일까? 어느 누가 뚜렷한 기준과 권위를 갖고 ‘당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설사 누군가에게 그런 자격이 주어졌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부정당한 사람들이 과연 ‘당신 말이 맞다’고 순순히 인정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도덕적 가치나 상식의 기준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하다. 동물에게 해를 입히는 명백한 폭력이나 불법행위가 아닌 이상, 그 행동이,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고 딱 잘라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수천 년간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왔음에도 내가 사는 지금 이 세상이 동물과 함께 살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긴 시간 동안 동물은 도구로 여겨졌고, 오히려 사람들은 동물을 향한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해왔다. 요즘 반려동물과 가족을 이뤄 사는 사람이 늘고, 동물의 권리에 대해 주창하는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띄지만, 대개 그런 모습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유별나다는 취급을 받는다. 사람도 살기 힘든 세상에 동물까지 챙길 새가 없다며 팔자 좋은 소리라는 핀잔도 듣는다. 하지만 동물과 인간의 기울어진 관계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명확해진다.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 없는 동물과 결정권을 가진 인간의 관계는 이미 기울어져 있다. 애초에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인간이다. 우리는 동물이 인간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동물 스스로 자신의 고통이나 피해를 밝힐 수도 없다. 우리 행위의 옳고 그름의 잣대 또한 우리의 판단과 태도에 달려있을 뿐이다.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래서 동물과 인간이 서로의 진정한 동반자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기울어진 저울의 무게를 맞춰야 한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권리를 쌓아왔다. 여전히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이나 권리가 억압된 경우가 있지만, 적어도 다시 예전으로 후퇴하지 못하도록 법과 사회적 규범이 지탱하고 있다. 인도주의 정신은 점점 더 폭넓게, 더 작은 틈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 태도와 마음이 언젠가는 분명 동물에게 닿을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는 동물과 함께 살기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숨쉬는 모든 존재를 감싸 안을 그 날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내가 해야하는 몫이 무엇인지 계속 찾을 것이고, 주어지는 것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혁구는 나의 사랑을 알고 있겠지. 눈은 너무 많이 먹지 말고. ⓒ bic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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