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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미 선 Apr 24. 2024

인생 그게 뭐라니?(1)

이래저래 환장할 봄







































벚나무야, 조팝나무야 좀 쑤셔서 겨울 동안 어떻게 살았니?

저 가지에는 몇 송이, 이 가지에는 몇 개. 

쪼물쪼물 수놓고 싶어 어떻게 견뎠니?


積算溫度(적산온도) 106도를 채워야 꽃이 핀다는 벚나무야.

그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날마다 까치발 들고 햇살을 보듬었겠구나.

꽃숭어리 건져내려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구나.


긴 준비기간에 비해 꽃들이 너무 일찍 사라졌다. 

한꺼번에 쓸고 간 연분홍 고갯길이 심심해서 어쩌라고.

그 길이 허전해서 어쩌라고.

이리도 일찍 떠나갔는가.




















일말의 아쉬움도 이별가도 없이 꽃이 졌다.

연분홍 치마도 입어보기 전에 꽃잔치는 서둘러 멍석을 접었다.

내년에 또 올게. 

그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아낙들은 시커먼 비닐봉지에 들녘의 봄을 담았다.

쑥 목대에  칼침을 놓고 봄을 낚아채고 있다.

쑥 무덤들이 소리 없이 숨을 죽인다.

짧은 생애가 이 봄날을 또 휘젓고 지나간다.


spring 은 용수철을 의미하듯이 봄은 도발적이다.

놀라운 탄성으로 붕 떠서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용수철.

그래선가 이 계절 봄은 툭 튀어나왔다 사라지는 습성이 있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젊은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18세기 후반, 

그 봄도 잔혹한 봄이었다.

독일의 사실주의 화가 빌헬름 엠베르크(1822~1899)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그려낸 그림에는 다섯 명의 처녀들이  등장한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책을 읽어주고 있다.

흰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쓴 아가씨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

팔을 턱에 괴고 앉은 아가씨, 허리를 꼬고 돌아앉은 아가씨.

이렇게 다섯 명의  아가씨들은 표정에서부터 벌써  짝사랑의 주인공 `베르테르`를 

열심히 연민하면서도 질투하고 있다.


저토록 `로테`에게 일편단심인 `베르테르`처럼 나를 사랑해 줄 남자가 없을까.

아가씨들은 찾아와 주지 않는 연인을 갈구하고 또 갈원 했을 것이다.

자신들을 소설 속으로 퐁당퐁당 밀어 넣으며 빠져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화가의 손에 그 소설을 그려내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소설은 시대를 관통했다.

그것은 그만큼 소설이 가진 비중이 크다는 걸 증명한다. 

`로테`의 사랑을 차지하지 못한 `베르테르`는 결국 권총자살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그 사회는 `베르테르 효과`를 반영한 젊은이들이 극단적인 자살로 이어졌던 암울한 봄이었다.

분홍봄이 아닌 검은 봄.


"이봐요, `괴테`양반.

이왕이면  찐하고 달착지근한 수밀도를 그려낼 것이지 어쩌자고 검은 봄을 그려내서 

이 사달을 만들었소?"

`에취`


"예끼, 이 사람아 나도 이렇게 까지 내가 대 스타가 될 줄 몰랐잖아.

이렇게 애들이 우르르 죽을 줄 알았다면 꽃분홍으로 했겠지.

젠장, 그렇다고 그렇게나 많이 죽어버리면 난 어쩐다냐. 내가 살인자가 된 거잖아"


한 작가의 영향력은 이처럼 단호하고 매웠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괴력이고 열풍이었다.

뜨겁되 차디찬 봄이었다.


어디 봄날의 비극은 그것뿐이랴.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도 쓰린 봄이다.

찰싹찰싹 얼굴을 때려주고 싶은 아린 봄이다.


"어떤 갠 날 보일 거야.

먼 수평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배가 나타나. 

하얀 배인데 항구로 들어오면서 고동을 울릴 거야.

보여? 그이가 온 거야! 

복잡한 시가지로부터 작은 점처럼, 한 남자가 언덕을 걸어 올라와.

누굴까? 뭐라고 말할까?

먼 데서 부르겠지. 

"나비!"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숨어 기다릴 거야.

놀라게 하려고, 또 조금은, 내가 죽을 거 같아서."


`나비부인`은 미군에게 속아 가짜 결혼을 한 `게이샤`가 결국 목숨을 끊는 비극을 담고 있다.

`푸치니`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만든 배경도 동아시아의 봄이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저런 독백을 했다.

꽃들이 만발한 이 찬란한 봄날에 `베르테르`도 `나비부인`도 아픔을 진하게 겪었다.


그렇다고 이 봄이 그렇게 야속하기만 할쏘냐.

어둠을 걷어내는 교황곡이 스러져가는 봄날을 역전시킨다.

슈만의 `봄의 교황곡 1번`이 그렇다.

인기 피아니스트 `클라라`와의 결혼이 이 곡을 완성 짓는데 한 몫했다. 


`클라라`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불사하고 결혼을 성사시킨 `슈만`.

그는  쓴 봄을 단 봄으로 회복시킨 주인공이다.

그래서 봄은 다시 황홀하다.

인생의 봄이고 사계 중의 여왕인 봄은 이렇게 음악으로 다시 살아났다.


四季(사계)의 첫 번째로 슬픔도 경탄도 쑥버무리를 만들어 놓은 봄.

엎치락뒤치락 암울함과 환희를 업고 이렇게 또 봄은 왔다.

조선시대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1758~1814)의 화풍에도 봄이 그대로 녹아있다.(하단 그림 참조)

하녀의 쟁반에 놓인 술상과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남녀의 신발이 어쩐지 수상하다.


`아니 도대체 이 양반 술상을 들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신윤복의 유쾌한 은유는 봄을 다시 환장곡으로 변모시켰다. 

양반들을 풍자하면서 봄을 유쾌하게 이끌고 간 화가의 익살스러운 성정이 

다시 봄을 분홍빛으로 와락 일으켜 세웠다.


담 모퉁이에 피어난 소담스러운 꽃이 찬란한 봄을 노래하고 있고,

술상을 받쳐든 하녀는 로맨틱 무드가 익어가는 저 방 안의 분위기를 

어쩌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다.

얼굴까지 발그레 물이 들었다.

`에햄` 하면서 양반 흉내를 낼 수도 없고 어쩌란 말이냐.


까딱 잘못했다간 양반에게 머리채를 뽑힐 처지고 보면, 

이 봄은 다시 메타포가 된다.

칫칫! 양반은 무슨 냥반.

로맨틱인지 로맨슨지 나는 모르오.

어서 술상이나 받으시오.


낄낄낄.

호호호.

껄껄껄.

깔깔깔.

남녀의 웃음소리는 곧 화사한 봄을  방안 가득 불러 들였다.


서양의 봄이나 동양의 봄이나 사랑으로 인해 슬프고 사랑으로 인해 달콤하다.

조선의 양반가에서 펼쳐지는 어설픈 유희도, 사람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든 것도 다 이다.

온통 꽃들이 피어나는 주변은 사랑의 촉매제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봄도 길게 드러누워야 맞다.

금세 떠나면 안 되는 거다.

슈만이 클라라와의 사랑에 성공한 것처럼, 이 봄을 나는 오래도록 껴안고만 싶다.

아주 길게 오래도록.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붙잡고 싶은 이 봄.

떨어져 내리는 연분홍 꽃잎이 내 머리에 잠시 앉았다가 떠나버렸다.

나를 위로했건만 나는 그 위로가 턱없다.

그래서 아주 깊게 요놈의 봄을 포옹하고 싶다.

봄은 四時長春(사시장춘) 이어야 한다. 그게 맞다.


신윤복의  춘화. 스케치북, 붓펜, 파스텔 채색.   필자.



























신윤복 화백께서 필자 그림을 보신다면. 

"어쭈, 이거 봐라. 그래 이왕 그렸으니 싱크로율 50% 줄게."

부끄러워 저 소나무 뒤로 숨고 싶어라.

그래도 현대라서 안주 가짓수가 더 많네. 푸하 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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