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들려 예약 도서를 대출하고 작은 미술관에 전시가 있어 들어갔는데 그림, 캘리그라피, 사진 거기에 시화전까지 함께 진행중이었다. 협회 사람들의 다양한 작품을 한 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전시장 중앙에 좌판을 깐 것처럼 널려있는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삶과 늘 함께 움직이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시를 읽는데 누구에게나 엄마는 큰 존재라는 생각을 했다. 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계시는 팔순의 오빠에게 칠순의 동생은 '오빠 괜찮아? 난 괜찮아'라고 하며 전화를 건다. 서로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 그래도 여직 살아있음에 안도하는 마음, 오빠의 안부를 묻는 칠순 동생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표지에는 유고작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세상에 무었을 남길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내가 몇살 때였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 읍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 지하 다방이 있었다. 10센티 정도 되는 높이의 작은 잔에 진한 우유가 한가득 채워졌다. 아빠는 커피 한 잔. 아빠도 그 때는 젊었겠지. 볼일이 있어서 읍내에 잠깐 나오면 버스 운행 횟수가 적은 우리집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반나절을 밖에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이유인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는 나를 지하 다방에 데리고 들어갔고 커피 한잔과 우유 한잔을 시켜 두툼한 소파에 앉아 시간을 죽였다. 코를 간질이는 우유의 진한 고소함이 아직 생각나는 걸 보니 아빠는 다방에서 커피만 마셨을 거다.
지금도 거리를 지나다 보면 지하 계단으로 연결되는 촌스럽게 반짝이는 다방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에도 코너만 돌면 나타나는 카페는 다방과 다르게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즐기는 문화 공간이 된 것 같다. 예전에는 음료만 즐겼다면 지금은 공부를 하거나 사무를 보기도 하고 모임을 갖기도 하니 복합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마스크를 벗고 박장대소를 하며 떠드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겠지만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며 소란스런 분위기를 연출하는 젊은 엄마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왔었다. 가끔 나도 박수를 치며 웃었을 수도 있겠다. 카페에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부러워 시를 쓴 칠십대 노인이 있었다. '칠십대 노인은 섭섭하다'는 시의 마지막 문장이었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카페에 앉아 친구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커피를 즐기는 노인분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마음이 쉽게 동의하지는 못했다. 차마 그 문화에 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엾다 생각한 것일까. 가끔 젊은 사람들 뺨치는 패션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면 그분들 보다는 젊지만 그러한 문화에 끼지 못하고 엉거주춤 대충 차려 입은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런 느낌이었을까. 그분을 카페에 모시고 들어가 맛있는 라떼 한잔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도 글을 쓰고 있어서 오늘 본 시집을 읽으며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던 걸까. 아니면 우린 모두 다르면서도 같은 삶을 살고 있기에 공감할 수 있는 걸까. 시의 언어는 조금 다른 것 같아 그들의 필력이 부럽기도 했다. 언어로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극도로 짧은 시적 언어는 속뜻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난 심상이 너무 깊은 시는 접근 하기도 전에 시집을 덮어버린다. 누군가는 정말 잘 쓴 시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택도 없다. 난 읽었을 때 술술 풀리는 시가 좋다.
우리 주변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작가들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다. 누군가는 글을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또다른 방법으로 삶을 표현하는 구나. 다른 듯 비슷한 삶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구나. 각자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일은 계속되는 게 맞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