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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Jan 17. 2022

문자 한 통의 통보

이십대의 동아줄이 날아가다

신이 나에게 교통사고를 허락하면서 마지막으로 준 동아줄은 ‘교대생’이라는 신분이었다. 그런데, 그 동아줄이 날아가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16년 1월 말, 당시 재학 중이던 교육대학교로부터 제적을 알리는 문자 한통이 왔다. 제적 사유는 학사경고 3회 누적이었다.

 

원칙상으로는 할 말이 없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학사경고를 우편으로 받지를 못 했었기에 너무나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매 학기마다 성적이 나빠 불안했지만, 처음 학사경고를 받을 때처럼 등기우편이 오지 않기에 괜찮나보다 하고 넘어갔었던 나를 자책했다. 아마도 너무 아픈 나머지 상황 판단력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2015년도 2학기가 마지막 기회인 줄 알았더라면, 교수님들께 사정해서 시험대체 과제를 내주실 수 있는지 부탁을 하든 뭐라도 시도를 해 볼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손을 쓰지 못 한 채 제적이 되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좋게 말하면 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한 성격에 아프다는 이유로 특혜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교수님들과 진솔한 소통을 하지 못 했었다. 어느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지 알리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는 행정적 방법을 알아보지도 않았었다. 정석대로 출결을 처리 받고 성적을 받다보니 성적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내 건강이 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이수해 내기에 무리였다는 것은 지금도 인정한다. 그래도 두 번째 학사경고를 인지하지 못 해서 아무 시도도 해 보지 못 했던 것이 한으로 남아 있다. 제적 후에 학생처에 찾아가서 두 번째 학사경고를 보낸 우체국 기록을 보여 달라고 했었는데, 없다는 답변을 받았었다. 나는 정말로 받은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너무 아파서 받고도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중요하고 충격적인 기억을 잊을 리는 없다고 본다.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다. 만약 가족이 받았거든 가족이 전해주었을 것이고, 또는 다른 주소로 가서 다른 사람이 잘못 받았다면 받은 사람이 서명한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른 주소로 잘못 가서 반송되었다면 반송된 기록이 있을 텐데 학생처 측에서는 그저 기록이 없다고만 하였다. 늘 기록의 중요성을 실천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거대한 실망이었다.


어떻게 대학교라는 큰 조직의 행정이 이렇게 허술하단 말인가?  내 소식을 알게 된 동기들이 모교지만 행정적으로 참 허술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내가 제적된 후 몇 달 후에는,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단체 문자가 나의 폰으로 오기도 했다. 소속이 없어졌다는 상실감과 여전히 찾지 못한 완치의 길을 찾아 헤매는 입장에서, 그 문자는 마치 나의 제적을 약 올리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도대체 두 번째 학사경고 우편물은 어디로 발송된 것인지, 학생이 그 정도 상황인데 왜 학과 지도교수님은 한 번도 나를 상담하고자 부르신 적이 없는 것인지,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서면을 언제 어디로 보냈는지를 왜 기록조차 남겨두지 않는 것인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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