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여전히 크고 화려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점점 작은 울타리 안으로만 모여드는 것 같다. 예전에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모임에 나가면 '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기심이 사라지고 낯선 만남보다는 익숙한 얼굴들만 편하다.
러닝이 유행하더니 언제부턴가 공원이나 강변에서 단체로 달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친구가 “야, 너도 같이 나가자.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운동도 되고 얼마나 좋아”라고 권유했지만,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나도 운동은 해야지'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달리는 상상을 하면 발걸음이 무겁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면서 필요한 에너지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늘 그래왔듯이, 나는 오늘도 아파트 헬스장으로 간다. 그냥 이게 편하다.
그리고 나는 늘 보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모이면 늘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아휴, 허리가 아파서 요즘 병원 다니고 있어.” “우리 애가 이번에 학교에서 또…” “나도, 나도 그래.” 반복되는 대화 속에 새로움은 없지만 묘하게도 그 반복이 편하다. 낯선 화제는 피곤하고 새로운 관계는 버겁다는 것을 체감한다. 차라리 익숙한 대화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놓인다.
예전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더 민감했다. 뉴스도 열심히 챙겨보고 사회 문제에 대해 친구들과 토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안다고 세상이 바뀌겠나'하는 생각이 앞선다. 차라리 가족의 건강이나 아이들의 앞날, 그리고 내 몸의 변화 같은 직접적인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관심의 반경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한 친구가 모임 자리에서 웃으며 말했다.
“야, 우리 얘기하는 거 보면 매번 똑같아. 지난달에도 똑같은 얘기 했던 것 같아.”
그러자 다른 친구가 대답했다.
“뭐 어때? 그래도 또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잖아.”
그 말에 모두 웃었지만, 사실 그 말이 정답 같다. 대화의 내용은 바뀌지 않아도 그 자리에 같은 얼굴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추억이라는 게 다 그런 거야. 별거 아닌 대화도 시간이 지나면 다 그리운 거지.”
새로운 만남이 아니어도, 새로운 대화가 아니어도, 오늘 같은 날이 다시 오지 않는다면 충분히 소중하다. 늘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과의 시간,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줄어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대신 익숙한 것을 더 깊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그렇고, 오래된 친구들이 그렇다. 새로운 모임에 나가면 더 많은 사람을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이제 그보다는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다. 늘 같은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 속에 우리의 시간과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큰 위로이자 행복이다.
결국,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 명확해지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가족과, 오래된 친구들과, 익숙한 대화 속에서 삶을 채워간다. 반복되는 일상과 대화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고, 오늘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간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움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은 마음을 자극하고 오래된 일상에 활력을 준다. 낯선 사람과의 짧은 대화나 평소와 다른 장소에서의 경험이 작은 변화를 만들어준다. 그것이 삶에 긴장감과 즐거움을 더해주지만, 그 새로움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익숙함 속에서 안정을 찾으면서도 가끔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하루를 조금 특별하게 만들고자 한다. 새로운 만남과 경험이 삶의 균형을 맞춰주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뭘 해볼까?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조용히 혼자 운동하던 습관에서 벗어나 나도 한 번 사람들과 함께 달려볼까? 새로운 모임이 주는 긴장감이 조금은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삶에 작은 활력을 줄 것도 같다. 오늘은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한 걸음을 내디뎌 보는 날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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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써온 저자의 다른 글이 '나도 10대는 처음이라서'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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