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필 초단편소설
나는 그저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아니해서는 안 됐다.
그녀가 나의 전화를 불편해하니까 말이다.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난 그때 그녀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전화를 한 번에 받아야 한다.
한 번에 받지 않으면 그녀는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화를 내는 건 아무렇지 않다.
다만 연락을 안 받았다가 그녀에게 연락이 안 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난 더 무서웠으니까.
나는 뭐든지 다 괜찮다.
그녀와 연락을 하고 통화를 하는 자체가 나에겐 행복이니까 말이다.
그날 새벽에도 어느 때와 같이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울리는 전화 벨소리.
나의 그녀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전화 벨소리가 마저 울리기도 전에 후다닥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난 이제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는다 기대감에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는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를 사랑한다면 지금 당장 와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달렸다.
생각할 이유 따위는 없다. 그녀가 날 부른다.
전화가 아니라 나를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자체가 날 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더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상관없었다. 난 그날 그녀에게 무조건 달려가야 했다.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기에 나의 두발은 미친 듯이 땅을 밟고 있었다.
난 어떻게든 그녀에게 가야 했다.
난 그렇게 그녀의 집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없는 새벽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녀에게 최대한 빨리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 새벽의 공기가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기쁨 마음으로 난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헐떡이는 숨을 참고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띵동 그녀의 집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집 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그래서 난 문을 열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겁에 질려 구석이 쪼그려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붉은색으로 물든 남자가 그녀의 옆에 곤히 누워있었다.
남자에게 나온 피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시원하고 찌릿한 냄새가 내 코끝을 건드렸다.
나는 그것이 피 비린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알지 못하면 안 될 정도로 방안은 피로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옆에 눈을 맞추고 쪼그려 앉았다.
떨림이 멈추지 않는 그녀를 안아주며 내가 물었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어쩌면 좋아? 내가 사람을 죽였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말했다.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이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천천히 방안을 살펴보니 그녀의 주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칼이 보였다.
그 칼이 아마 그녀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난 본능적으로 옆에 놓였던 칼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칼을 집어든 나의 모습에 놀랐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내가 한 거야..."
"너 나 알잖아?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의 손을 더 꽈악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참 따듯했다. 난 그녀의 따듯한 손을 잡고 말했다.
"괜찮아... 다 생각이 있어..."
그렇게 그녀를 안심시킨 나는 나의 옷으로 칼의 손잡이를 닦았다.
그리고 나의 지문을 묻혔다.
나는 피범벅이 된 그곳을 미친 듯이 굴렀다.
난 그녀를 위해서 그 남자의 피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 내가 죽인 거야... 그러니까 넌 우선 우리 집에 가있어..."
나는 이제 남자를 죽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죄를 뒤집어썼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다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정체는 누군지도 모른다.
뭐 알 필요도 없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손도 떨리고 몸도 떨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만 무섭지 않다면 말이다.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가득 들어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녀를 구출해야 한다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경찰서죠?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난 징역 15년을 구형받았다.
결코 짧지 않은 형벌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난 그녀를 구해냈으니까.
징역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날 시간이 나는 데로 찾아와 주었다.
난 너무 좋았다. 올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행복했다. 그녀가 날 따스하게 대해주니까.
시간이 흐릴수록 그녀도 점점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에도 더 이상 그 남자에 대한 죄책감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편하게 지낼 그녀의 생각에 난 안도를 했다.
그렇게 그녀는 10년간 날 열심히 찾아와 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한 순간도 잠시.
어느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날 찾아오지 않았다.
10년은 그녀가 찾아와 행복했지만 그녀가 찾아오지 않은 5년은 지옥과 같았다.
괜찮았다. 5년만 있으면 나가서 그녀를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마 그녀가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을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남은 5년은 오로지 출소만 생각했다.
밖에 있는 그녀를 생각하면 5년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출소를 하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갔고 난 마침내 출소를 했다.
내가 출소를 하던 날.
그녀는 역시 날 찾아오지 않았다.
서운했다. 내가 보낸 시간의 대부분이 다 그녀를 위함이었는데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그녀는 핸드폰 번호도 바꾼 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난 그녀를 찾기로 결심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도대체 왜 나에게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미친 듯이 그녀를 찾아다녔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
그리고 난 마침내 그녀를 찾았다.
간절함 끝에 마주한 그녀.
난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멀리서 바라본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띠고 이었다.
그녀를 닮은 5살짜리 딸이 있었고 젠틀한 남편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내 지난 시간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억울함이 나에게 몰려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날 그녀에게 다가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선 내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녀는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난 그녀를 위해 날 버렸는데... 그녀는 날 보자마자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난 이제 그녀에게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응 잘 지냈고... 앞으로 더 잘 지내고 싶어... 그래서 당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또다시 나에게 들려오는 그녀의 부탁.
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힘든 인간이다.
또 그렇게 그녀의 부탁을 듣고 돌아서려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넌 나한테서 15년이란 시간을 그리고 인생을 다 뺏어 갔잖아?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그중 10년은 널 행복하게 해 줬고 너도 나로 인해 인생이 조금은 즐겁지 않았어? 그리고 넌 날 사랑하잖아? 아니야?"
"그래. 맞아. 사랑했어."
나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나의 그동안의 진심은 그녀에게 전혀 전달이 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의 15년.
그리고 잃을 것도 더 이상 없는 앞으로의 나의 인생.
아니 다 잃어도 그녀만 내 곁에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가줘!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매몰차게 나를 더 몰아세웠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너에게 돌려줄 거는 이것밖에 없네... 너에게 받은 거니까 다시 돌려줄게."
나는 그녀에게 받았던 칼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 칼을 받은 그녀의 복부에서는 따뜻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진심을 느끼는 순간은 오직 이 순간 밖에 없음이 참으로 슬펐다.
그리고 난 또다시 전화기를 들고 얘기했다.
"경찰서죠? 제가 이번엔 진짜로 사람을 죽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