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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May 18. 2021

'사장님'이라는 외로움

 

  "다 할 줄 알아야 해."  


  연장통에서 망치와 못, 드라이버 등을 꺼내면서 엄마는 나를 불렀다. 어떻게 하는지 잘 보라고 했다. 세탁기가 고장 나 AS기사님이 오시면 엄마는 또 나를 불렀다. 기사님이 세탁기를 어떻게 고치는지를 눈여겨보라고 했다. 냉장고가 고장 나도,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도, 베란다에 결로가 생겨 곰팡이가 펴도 엄마는 나를 불렀다. "잘 봐 둬." 


  엄마는 10살 무렵의 어린 나를 옆에 앉혀놓고 부동산 계약서를 썼고, 보험 설명을 들었다. 내가 멀뚱멀뚱 앉아있으면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너도 잘 들어놔." 생명보험이 뭔지 상해보험이 뭔지 아무리 들어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앉아서 설명을 들었다. '진단금', '만기 일시지급' 등 처음 듣는 어려운 말이 많았는데, 엄마는 일단 잘 들으라고 했다. 은행에 가서 예금 적금 설명을 들을 때도, 대출을 받을 때도 엄마는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말했다. "잘 들어놔." 


  엄마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걸 물어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언젠가 꼭 해야 할 때 몰라서 못하는 게 부끄러운 거지. 다 할 줄 알려면 물어봐야 해. 계속 물어봐. 혼자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아빠도 그랬다. "오늘은 카센터에 가자. 엔진오일을 교환해야 해." 나는 아빠와 카센터에 가서 엔진오일을 어떻게 교환하는지를 봤다. 아빠는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또 카센터 사장님이랑 대화할 수 있겠어?" 

  차 밑에 들어가 웅크리고 일하고 있는 카센터 사장님에게 나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엔진오일이 뭐예요? 그건 왜 교환하는 거예요? 안 하면 어떻게 돼요?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얼마나 자주 해야 해요? 그 기름은 왜 그렇게 까만 거예요? 옆에 있는 아빠는 흐뭇해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아빠는 말했다. "이다음에 커서 카센터 차려도 되겠네, 우리 딸."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잘 봐 뒀지?"


  중학생 무렵부터 나는 컴퓨터를 포맷하고 필요한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PC를 분해해서 청소하고 조립했다. 포토샵과 MS 프로그램으로 온갖 것들을 만들어냈고 이건 엄마의 살림살이와 아빠의 일상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부모님은 뿌듯해하며 서로 말했다. "우리가 참 훌륭한 딸을 낳았어." 


  생활 속의 어떤 문제 앞에서도 나는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부러진 의자를 고쳤고, 뜯어진 이불을 꿰매었다. 변기가 막히면 뚫었고, 싱크대가 막히면 고무장갑을 끼고 손을 넣어 후벼 파 해결했다. 


  스물두 살 때 필리핀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집에 인터넷 설치를 해야 하는데, 안테나를 달러 온 사람들이 팔짱을 낀 채 어떻게 위로 올라갈 건지만 한참을 논의하길래 답답해서 내가 지붕 위로 기어 올라가 안테나를 달았다. 데리고 살던 초등학생들이 "선생님!" 하며 나를 부르면, 나는 뛰어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했다. 문이 안 열리면 열리게 했고, 불이 안 들어오면 불을 달았다. 


  별거 없었다. 

 







  카페 사장이 되고 계절이 3번 바뀌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한겨울에 온수기가 고장 났었고(참고 : <네, 제가 주인입니다.>), 커피머신도 골골댔다. 1시간 동안 난데없이 정전이 되기도 했고, 쇼케이스 물받이 통에서 물이 넘쳐 카페 바닥이 한강이 되기도 했다. 갑자기 밀려든 단체주문에 우유가 모자라 마트로 달려가 우유를 사 오기도 했고, 마감 직전 들어온 손님 때문에 급히 아이스크림을 사 오느라 빗속을 뚫고 달리기도 했다. 그렇게 겨울을 보냈고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기막힌 문장을 보았다. "직원은 일이 힘들면 사표를 내면 되지만 사장은 끝까지 방법을 찾아서 해내야 하는 사람이다."


  아, 맞네. 이거네.


  지난주에 과일 주스를 한답시고 딸기와 토마토, 바나나를 블렌더에 갈고 한입 먹고 버리고, 다시 갈고 한 입 먹고 버리고, 다시 또 갈고 한 입 먹고 버리고를 계속 하다 보니 싱크대가 막혀버렸다. 우리 알바생은 설거지를 하다 말고 "사장님..."하고 울먹울먹 하며 나를 불렀다. 보아하니 물이 밑으로 빠지지 못하고 싱크대 안에 넘실넘실 대고 있었다. 나는 알바생에게 말했다. "비켜봐. 고무장갑 일로 내." 

  소매를 걷고 고무장갑을 손에 꼈다. 넘실거리는 물속에 손을 집어넣고 물 빠지는 구멍을 후벼 파고 긁어냈다. 안에서 뭉쳐있는 토마토 찌꺼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손으로 잡아 뺐다. 넘실대던 뿌연 물이 밑으로 쑥 내려갔다. '밑에서 막히면 안 될 텐데' 싶어 약품을 붓고 뜨거운 물도 함께 부었다. 마지막으로 싱크대를 한 번 싹싹 닦고 물로 쓱 한번 헹구고 나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졌다. 별 일 아니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 다시 알바생에게 건네주었다. 고무장갑을 손에 끼며 알바생은 말했다. "역시 사장님."


  나는 사장이라,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우리 부모님의 "다 할 줄 알아야 해" 하는 교육방침 덕분에 나는 겁 없이 일에 뛰어들고, 연장을 들고 뚝딱뚝딱 일을 한다. 테라스 전구에 불이 나가면 전동드라이버를 들고 나가 드르륵드르륵 하면서 전구를 갈고, 비바람 치는 날이면 비를 쫄딱 맞아가며 테라스의 테이블과 의자를 안으로 들여놓는다. 박스를 들어 옮기고, 사다리 위에 성큼성큼 올라가 천장에 손을 뻗는다. 그러는 사이 여기저기 긁히고 멍이 들지만, 별 일 아니다. 곧 낫는다. 조금 아프지만 괜찮다. 더 아픈 일이 그동안 훨씬 많았다. 이 정도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덜컥 일어난다. 가게 일이라는 게 그렇다. 누가 알았을까. 갑자기 제빙기에서 얼음이 안 나오고 물만 쏟아질 줄. 날씨는 더워지고,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먹던 손님들이 점점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문을 바꾸는데 이 타이밍에 카페에 얼음이 떨어지다니. 

  제빙기 안에 있는 얼음을 보아하니 오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스 음료를 찾는 손님에게 뜨거운 음료를 권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손님이 오지 않기를 바라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다. 알바생은 "오늘 오전 영업만 해고 문 닫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하고 맘 편한 소리를 했지만, 난 사장이었다.


  급히 제빙기의 사진을 찍고 제빙기가 작동하는 모습을 동영상 촬영했다. 근처의 AS 기사님을 수소문했고, 통화했고, 사진과 동영상을 보냈고, 당장 와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리 빨라도 오후 4시나 되어야 도착할 거라고 하는 기사님에게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서둘러 주시면 너무너무 감사하겠어요!!"라고 애원했다. 

  기사님이 오시고 제빙기를 고치는 동안 나는 어렸을 때 카센터 사장님에게 물어봤던 것처럼 또 온갖 것들을 물어봤다.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왜 그런 거예요, 무슨 부속품을 어떻게 교체해야 하는 건가요, 어떻게 하는 건가요, 혹시 또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제가 부속품 사다가 고칠 수 있을까요.


  수리비용을 지불하고, 기사님이 돌아가셨다. 주방에 혼자 앉아있는데,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다. 얼음 떨어지는 소리였다. 얼음이 나오는구나. 그동안 이 소리가 참 요란해서 정신 사납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안도감이었다. 얼음이 나오는구나. 





  카페 일은 끝없이 일어나는 문제들과 해결의 반복이다. 아마 우리 카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아니, 카페만 그런 것도 아니다. 모든 가게들이 그럴 것이다. 모든 자영업자들은, 그러니까, 모든 사장님들은 매일매일 온갖 문제들을 마주하고, 그 일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 알바생이 퇴근하는 길에 보니, 비둘기가 한 발 한 발 걸어서 옆집 갈빗집으로 들어가더란다. 세상에, 비둘기가! 다음날 이 이야기를 듣고 갈빗집을 기웃기웃해보니 그곳에 더 이상 비둘기는 없었다. 


  알바생은 비둘기가 뚜벅뚜벅 갈빗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며 웃었지만, 나는 심각해졌다. 우리 카페에 비둘기가 걸어 들어오면 어떡하지? 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고양이도 아니고 비둘기가! 아니 글쎄 비둘기가! 손으로 잡아서 내놓을 수 있는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훠이훠이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갈빗집 사장님은 그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비둘기를 어떻게 밖으로 내보냈을까. 

  내가 심각해진 걸 보고 알바생도 함께 심각해졌다.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바로 옆 갈빗집에 비둘기가 걸어 들어갔다면, 얼마든지 우리 가게에도 비둘기가 들어올 수 있는 일이었다. 소리를 질러 내쫓아야 하나 잠자리채로 잡아야 하나 119를 불러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알바생이 편의점으로 뛰어가 새우깡을 사 오기로 했다. 그래, 새우깡으로 유인해보도록 하자.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렇게 한 번 해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 평화롭게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게 제일 좋겠다.  


  자영업자의 하루하루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시간들이다. 예상했던 문제가 일어나기도 하고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게 무슨 문제든, 작은 문제든 큰 문제든, 돈이 드는 문제든 돈이 들지 않는 문제든, 아무튼 사장님은 그걸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는 내 능력 밖이네"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게 사장님이다. 문제들을 해결하다 지쳐 "아, 더는 못해먹겠네" 할 수 없는 게 사장님인 것이다. 사장님은 어떻게든 해결해내야 하고, 어떻게든 가게를 평화롭게 지켜내야 한다. 


  다른 많은 사장님들은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훨씬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셨을 것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 속에서 마음도 많이 단단해지고 나름의 노하우도 많이 생기셨을 것이다. 아마 그 비둘기 사건도, 그 갈빗집 사장님은 아무렇지 않게 그냥 스르륵 해결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 장면을 봤어야 하는 건데. 배웠어야 하는 건데. 엄마가 "잘 봐 둬"라고 했던 그 말처럼 잘 봐 뒀어야 하는 건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면, 가게 앞에 내놓은 배너들이 위태로워진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넣어놓고 돌을 받쳐 놓지만 강한 바람은 배너를 사정없이 흔들어댄다. 내가 바람 속에서 배너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뛰어나온 옆집 사장님이 바람 풍선의 바람을 빼고 온 몸으로 풍선을 구기면서 나에게 소리쳤다. "바람이 이렇게 세게 불 때는 그냥 집어넣어요! 그거 넘어져서 사람 덮치면 그게 더 큰일이더라고. 해결할 수 있을 때 해결해요!" 아, 이런 생생한 조언. 역시 사장님. 


  "해결할 수 있을 때 해결해요!"라는 그 말을 깊이 새겼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잘 들어놔!"라고 했을 때 내가 잘 들었던 것처럼, 옆집 사장님의 그 말을 나는 잘 들어 두었다. 


 




  출근하고 퇴근하는 길에 유리창 안 다른 가게의 사장님들의 모습을 본다. 나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사장님들. 쉬는 날이면 다른 가게에 들러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사장님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핀다. 그 어떤 가게에서도 편히 앉아 쉬는 사장님을 보지 못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다들 분주하셨다. 아마 문제들을 해결하는 중이셨을 것이다. 이번엔 또 어떤 문제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모든 사장님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못 본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고 뭐고 '이건 못하겠다'라고 던져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힘들다고 징징댈 수도 없지만, 징징댄다고 받아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사장님이니까. 사장님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사장님은 참 외로운 직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외로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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