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낙상, 고관절수술, 요양병원, 그리고 장례식

by 조와와왈

https://brunch.co.kr/@joreka/25


그날의 묘사를 이렇게나 길게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날은 마치 내게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들처럼 각인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날 이후 화목한 줄만 알았던 우리 가족은 물론 아빠의 형제들 즉 아빠의 원가족은 묘하게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면서 서서히 멀어지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 시선에서 관찰된 갈등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먼저, 우리 가족은 이미 할아버지의 돌봄 문제로 큰 갈등과 불화 중에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 혼자되신 할아버지를 장남인 우리 아빠가 집으로 모시고 싶다고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긴 했다.

아빠의 억지 덕분에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긴 했지만 한 달도 안 되어 갑갑하다고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아니.. 우리 집안 평화가 깨져서 아빠의 형제 누군가가 모시고 할아버지가 살던 곳으로 갔다.

내가 아빠와 싸우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 본인이 하고 싶은 효도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집에는 아무도 없다.

물론 엄마가 있긴 했지만 식사를 챙겨드리는 것 외에는 딱히 같이 할 것이 없었고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의 루틴이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그냥 하루 종일 멀뚱히 거실에서 티브이만 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게다가 이상한 일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할아버지는 모든 걸 너무나 의존하려 했다.

아니, 아빠가 그렇게 만들었다.

원래 식사도 스스로 하셨는데 우리 집에 오셔서는 식탁에 오실 필요가 없게 거실 소파에 앉아서 드실 수 있도록 상을 봐드렸고 나중에는 아빠가 밥까지 떠먹여 드렸다.

어찌 된 일인지 어린아이가 퇴행하듯이 용변을 해결하는 것도 혼자 힘으로 하지 않으려 해서 안방에 이동식 변기까지 놓게 되었다.


아빠가 있을 때는 뭐 아빠가 하니까 상관이 없었는데..

그 외에 시간이 문제였다.


하루는 아빠가 출근하고 없는데 할아버지가 이동식 변기에 큰 볼일을 보셨다.

안방에 화장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열 걸음만 걸으면 화장실에서 다 해결을 할 수 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방 안에서 내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뭔가 스멀스멀 악취가 나기에 거실로 나가보았더니 동생과 엄마가 난처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니.. 머리는 멍해지고 냄새에 헛구역질만 올라와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극심한 변비로 일이 주에 한 번씩 겨우 큰 일을 보셨는데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억지로 관장을 해드리거나 파내는 경우도 있다고 했었다.

그러니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했을지....


결국 뒤처리는 동생이 고무장갑과 스노클링마스크를 끼고 겨우 해내었지만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노발대발을 하며 마치 자기가 큰 수치를 당한 것 마냥 펄펄 뛰고 그 따위로 할 거면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내가 집을 뛰쳐나온 것이었고...


나로서는 참 어이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중학생 때 대폿집안주인 무르팍에 누워서 낮술을 마시다가 동네 골목에서 하수가 넘친다는 소식에 힘자랑 하느라 맨홀뚜껑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처음 뇌출혈이 왔다고 했다.


산동네에 사니 차가 올라올 길도 없었고..

60년대에 뭐 응급시스템이 있었을 리도 없고..

중학생인 아빠가 자기보다 더 큰 할아버지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살려놓았다고 했다.


원래도 가정경제에는 큰 도움이 안 되는 양반이었는데 그 이후로 평생을 환자로 수발받으면서 할머니가 시장에 푸성귀 등을 내다 팔아서 겨우 겨우 살았다는 거다. (할머니의 표현)


그래서 우리 할머니는 장남인 우리 아빠를 남편이자 아들이자 친구이자 아버지인 듯 의지하며 살았고 우리 아빠도 자의 반 타의 반 없는 집 장남으로 먹고사느라 힘들었다는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나는 그 장남의 맏이로 태어나서 할머니에게는 마치 자식 같은 첫 손주였는데..

그래서 온갖 집안 비밀도 알 수 있었고 생각해 보면 편애라는 이름의 감정쓰레기통 역할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할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다.

할머니 장례식에서 무덤덤한 할아버지 모습에 실망한 아빠는 할아버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거나 원망하는 말들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렇게 하는 것과 달리 무슨 일인지 이제와서는 세상에 없는 효자 같은 행동을 하니 나는 정말로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


하여튼, 할머니 사후에 할아버지를 돌보는 문제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은근히 부담을 가지는 모양이었다.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맏이인 우리가 온전히 모셔야한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강력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나서서 할아버지를 모시겠다고 하지않았다.

오히려 무슨 말을 해서 불이익이 올까봐 다들 말을 아꼈다.

결국 우리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 장기요양보험제도를 통해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하루 3시간씩 할아버지 집에 와서 살림을 돌보아 주고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차츰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일상을 영위하는데 가장 큰 문제였던 식사문제와 가사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할머니 살아 계실 때와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시게 되었고..

그.. 김장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너무나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밖으로 크게 드러난 불화는 아니었지만 그때의 경험들은 모두에게 다른 형태로 하나의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나 또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을 만큼 큰 경험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그날 이후의 이야기는 이렇다.

할아버지는 초겨울의 김장하던 날.. 119에 실려나가시긴 했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동네 정형외과 전문병원에서는 너무 고령이라 안된다고 했다.

종합병원에서도 같은 소리를 했고.

결국 한참 떨어진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받아줘서 검사를 했더니 고관절이 골절되어 전신마취를 하는 큰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응급으로 입원수속을 할 수 있었고 며칠 후에 커다란 쇳덩이를 박는 수술을 했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우리를 못 알아봤다.

눈앞에 뭔가 있는 듯 허공에다 손을 휘적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운 것인지 그냥 흐른 것인지 모를 눈물이 눈가에 가득했다.

그게 섬망이라고 했다.


며칠쯤 지나니 평소의 할아버지처럼 의식이 회복되었다.

자손이 20명쯤 되지만 24시간 곁에서 돌볼 사람은 없어서 간병인을 구했다,

고급 동네 대학병원의 24시간 간병만 전문으로 한다는 세련된 아주머니가 선글라스에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다.

"딸기가 잡숫고 싶다 하시네"

"슈크림빵이나 생크림 케이크가 잡숫고 싶다 하시네"

"병실에 다른 환자랑 선생님들도 드려야 하니 넉넉히 사 오는 거 아시죠?"


평소에 요구사항이 일절 없는 우리 할아버지는 대학병원 입원 2주 동안 먹고 싶은 것이 어찌나 많으신지..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퇴원통보를 받은 날 간병인은 온 병실에다가 거동도 못하는 노인을 옮긴다고 세상천지에 이런 불효자들이 어디 있느냐고 고함을 쳤다.


아니, 우리가 옮기고 싶은 게 아니고 병원에서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다고요..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울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어찌 된 영문인지 2주 동안 정이 든 간병인 손을 뺨에다 비비며 그 손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손짓발짓을 하며 돈을 달라기에 무슨 소리인지 차근히 물었더니 간병인 팁을 줘야 한다는 거다.

문병을 왔던 친척들이나 삼촌들이 용돈을 준 모양이었는데 그걸 쓰시라는 엄마 말에 간병인이 수고하니 다 주었다고 하였단다.

여우 같은 간병인이 어떻게 영감님을 꼬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친척들이 문병 오며 쥐어준 용돈도 이미 다 털렸던 것이다.

아빠는 너무나 어이없는 광경에 넋이 나간 모양이었고 엄마에게는 나중에 그날 부끄러운 것은 둘째치고 속에서 천불이 나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퇴원수속을 밟기 전에 대학병원 담당의사를 만나고 온 아빠는 한 번 더 어이없는 일을 당했다.


수술은 너무 잘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너무 고령이라 재활은 어려울 것 같다고 아마도 다시 걷기는 힘드실 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했다.

아니 그럴 거면 수술을 왜 한 건지?

그 많은 수술비와 수술로 인한 할아버지의 인지문제, 그리고 와병환자가 되어 버린 할아버지의 돌봄 문제는 어쩌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건지.


할아버지가 넘어져서 119를 부르긴 했는데,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사전에 대비를 할 수도 없었을뿐만아니라 수술, 재활, 퇴원, 요양에 이르는 경로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닥치니까 그 순간순간마다 빠르게 결정해야했고 뭘 알아보거나 고심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도 못하고 아빠는 아빠 친구가 일하는 요양병원으로 할아버지를 모시기로 했다.

아빠의 다른 형제들은 그저 동생들이라는 이유로 결정이라는 중요한 사안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아빠는 동생들에게 의견을 구하는 눈치였으나 그 누구도 이러자 저러자 속시원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대학병원에서 퇴원을 한다니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또다시 다른 낯선 병원으로 오니 적잖이 당황하여 계속 집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다.

하지만 집으로 가셔도 일단 걸을 수가 없고 전담해서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적어도 혼자 걸을 수 있게 되면 집으로 가시자고 삼촌이 겨우 달래서 입원을 하였다.


문병을 가보니 대학병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병원 로비로 들어서는 순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건 용변과 식사, 소독약냄새가 섞인 것이었다.


요양병원에 가서도 진단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입원할 때부터 모든 것은 돈과 연관이 되어있었는데..

병실의 크기, 재활여부 등등에 따라 한 달 입원비가 결정되는 시스템이었다.

재활신청을 하여도 할아버지가 너무 고령이라 고통이 극심할 것이고 억지로 걸으려다 재낙상 할 위험도 있을 것이고.. 고통을 이겨낸다 해도 재활의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가족들이 그 말을 크게 믿지 않았다.

수술부위가 아물고 시간이 나면 저절로 서고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내가 그런 기대를 했으니 아마 아빠도 삼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빠는 할아버지 집에 안전손잡이를 설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에게 물었고 나는 알아보겠노라고 했다.

문병을 올 때마다 삼촌은 빨리 밥을 많이 먹어야 형님들이 집에 모셔간다며 협박 아닌 협박으로 할아버지를 위로했다.


아빠와 삼촌 외에도 다른 삼촌들이 있었지만 자주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딱히 애정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긴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일을 두고 아빠는 내내 서운해했다.


그 서운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6개월, 할아버지는 낙상이 원인인 급성 패혈증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김장하던 날